고용노동부가 지난 겨울 발생한 메탄올 급성 중독 산재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됐던 가운데 한 민간 학술단체가 관련 연구를 제안하고 나섰다.

산업보건 전문가들로 구성된 한국산업보건학회(산업보건학회)는 지난달 10일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 메탄올 급성중독 산재와 관련한 학술 연구 과제를 공모하기 시작했다.

학회가 발주한 연구 과제는 △CNC 가공공정 메탄올 중독 피해환자군 사례조사 및 사후관리 방안 △사고 전후의 CNC 가공 사업장 여건 및 환경변화 연구 △사고 이후의 정부 대응과 사후관리에 대한 조사 등 세 가지로, 피해자, 재해사업장, 정부 등 사건과 관련된 이해당사자에 대한 총체적 조사를 예정하고 있다.

▲ 한국산업보건학회는 지난 5월10일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 메탄올 급성중독 산재와 관련된 학술 연구 과제를 공모하기 시작했다.

피해환자군 연구는 향후 작업환경관리 및 직업병 예방을 위한 기초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발주됐다. 연구자는 피해자의 근무 이력 및 근무형태를 조사하고 CNC 가공 작업 과정에서 안전보건관리와 메탄올 독성에 대해 교육받았는지를 조사하게 된다. 또한 증상이 악화된 이후부터 직업병 판정을 받기까지 과정을 파악하고 최초 증상이 나타난 시기와 조치, 사후 겪는 문제점 등을 조사한다.

CNC 가공 사업장 연구는 하청업체 산업보건관리를 개선하는 데 활용될 수 있어 향후 추가 재해 발생을 막는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조사다. 연구자는 메탄올을 취급하는 CNC 공정 사업장을 직접 조사해 공정 현황, 메탄올 사용 실태, 파견노동 고용실태 등이 사고 이전과 이후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조사한다.

또한 재해가 일어난 사업장을 추적 조사해 사업장 규모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위치를 옮겼는지, 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이전했는지, 관리자 인식과 태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등도 연구 항목이다. 메탄올 외 CNC 가공공정이 사용하는 화학물질 현황과 각각의 노출 정도를 측정하는 것도 연구자의 과제다.

세 번째 연구 과제는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산업안전 근로감독을 맡는 고용노동부에 대한 조사다. 현재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이 취하고 있는 조치가 적절한지 등을 연구하고 정책 개선을 위한 기초자료를 조성하는 것이다.

연구자는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 등 유관 정부기관이 실시한 근로감독, 언론홍보, 회의, 관련 노동자 보호조치, 대책 등을 조사하고 그 조치들의 효과와 효율을 평가하는 과제를 갖게 된다.

▲ 노동건강연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등 9개 시민사회단체는 2월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불법파견 노동자 메틸알코올 중독 실명 방치 박근혜 정부와 LG·삼성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이번 연구 발주가 의미 있는 이유는 안전한 작업 환경 조성 및 산재 예방 책임을 가진 고용노동부의 대책이 이보다 미진하다는 데 있다.

고용노동부는 메탄올 급성 중독 산재가 발생한 지난 1월 보도자료를 내 유사작업장 8곳에 대한 산업안전보건감독 및 임시건강진단을 실시하고 메탄올 취급 사업장 3100곳에 대한 안전보건관리실태 전수조사를 대책으로 발표한 바 있다. 또한 고용노동부는 16만 개 사업장에 ‘화학물질안전보건관리 10계명’ 및 ‘경고표지 샘플’을 배포했고 MSDS(물질안전 보건자료 : 화학물질 위험성을 표시한 자료) 부착 및 경고표지 이행실태를 감독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에 대해 지속적으로 대책 마련을 주장해온 시민단체 ‘노동건강연대’는 성명서를 통해 “정부가 이번 사고를 몇몇 영세업체의 일탈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으로 치부하여 임기응변식 대책과 미봉책에 그친다면 향후 비슷한 사고가 재발할 가능성이 많다”며 “이번 사고는 핸드폰 부품 생산업체 전체의 화학물질 취급 관리 부실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이번 사건을 메틸알코올이라는 특정 화학물질에 대한 취급 관리 부실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고용노동부가 ‘수사 중인 사건’이라는 이유로 감독 결과를 발표하지 않는 데 대해서도 노동건강연대는 “고용노동부 내에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여 광범위하고 철저한 역학조사를 수행하고 실시간으로 국민들과 관련 내용을 의사소통하여야 한다”고 비판했다.

산업보건학회가 가장 방점을 찍는 부분도 “1차원적 접근으로는 재해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박두용 한국산업보건학회장은 “산업안전보건 관련법은 ‘설치해라. 알려줘라. 교육해라. 마스크 지급해라’ 등 전부 ‘무엇을 하라’는 것이다. ‘메탄올은 나쁘니 쓰지마라. 쓰면 나쁜 놈이다’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메탄올을 에탄올로 바꿀 수 있게 만들 건지, 어떻게 더 안전하게 사업할 수 있게 하는지가 과제”라고 강조했다.

▲ 2014~2015년 주요 산업재해 실태 자료. 사진=민주노총

박 학회장은 “실제로 현장에선 사후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어떤 영향이 주어지고 있는 건지 추적을 해야 장기적으로 위험이 외주화되고 있는 부분들을 진짜 관리할 수 있다”면서 “이번 사건으로 일부 3차 하청업체가 베트남으로 이전했다고 들었다. 이렇게 되면 일자리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런 식이 해결방식이 맞는 건지 등도 학술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기관처럼 자료 청구 권한이 없는데 조사가 제대로 될 수 있는지 지적에 대해 그는 “(협조를 안하는) 사업주가 어떤 반응을 왜 보였는지 아는 것 또한 연구의 의의다. 우리 방식에 뭔가 틀렸을 수 있고 이를 드러내는 조사를 하는 것도 연구의 목표였다”면서 “부산까지 가야 하는데 표조차 못 사서 서울역에 멈춰있다 해도 왜 표를 못 샀는지, 어떤 제한점이 있었는지를 드러내며 연구가 지향하는 바를 정확히 나타내는 것도 연구의 중요한 의미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책정된 연구비는 연구 당 700만 원 이하고 연구 기간은 올해 6월부터 12월31일까지다. 부족한 연구비에 대해 박 학회장은 “학회 기금이 2000만 원으로 한정돼있고 필요한 연구는 세 가지다 보니 700만 원 정도로 책정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연구자들에게) 연구비의 갭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자체가 우리의 숙제다. 재공고를 통해 논의와 고민의 과정을 거칠 것”이라 밝혔다.

1차 공고 결과 노동건강연대가 피해환자군 연구 과제의 연구자로 선정됐고 나머지 두 연구 과제 연구자는 선정되지 못해 2차 공모가 진행되고 있다.

메탄올 급성 중독 산재는 지난 1~2월 삼성·LG전자의 3·4차 휴대폰 부품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파견노동자 4명이 메탄올 급성 중독으로 인해 실명한 사건이다. 모두 휴대폰 부품 자재인 알루미늄을 절단·가공하는 CNC 공정 사업장에서 발생했고 메탄올은 알루미늄 절삭 용액으로 사용됐다. 피해노동자들은 모두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는 20대 파견노동자로 밝혀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원청인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노동건강연대 등 원청의 책임을 묻는 시민사회단체에 ‘1차 협력업체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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