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업 인권 이행지침 준수 실태를 조사한 ‘UN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이 “한국 정부가 UN 기업 인권 이행 지침을 잘 이해하고 있고 기업들도 이행지침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고 평가해 논란을 낳고 있다. 피해 현장과 괴리가 큰 결과에 일각에선 “유엔이 정부와 기업의 거짓말에 속았다”는 평가가 제기되고 있다.

지난달 23일 방한해 31일까지 한국의 기업 인권 실태를 조사한 UN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은 1일 정오 서울 소공동 프라자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결과 예비보고서를 요약 발표했다. 이날 오후 공개 예정인 예비보고서에는 한국 정부·기업의 이행지침에 대한 실무그룹의 평가가 담겨있다. 단테 페스케 실무그룹 위원장과 마이클 아도 실무그룹 위원이 기자회견에 참석해 1시간 넘게 기자의 질의에 응답했다.

▲ 지난달 23일 방한해 31일까지 한국의 기업 인권 실태를 조사한 단테 페스케 'UN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 의장(오른쪽)과 마이클 아도 실무그룹 위원(왼쪽)은 1일 정오 서울 소공동 프라자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결과 예비보고서를 요약 발표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UN 기업활동과 인권 이행지침’은 2011년 UN인권이사회가 만장일치로 채택한 것으로 정부와 기업이 생산·판매·노무관리 등의 기업활동에 따른 인권 침해를 방지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원칙을 제시하는 지침서다. 실무그룹은 각 정부·기업의 이행지침 준수 실태를 평가하면서 기업의 인권 보호책임을 확산시키는 단체로, 5명의 독립전문가가 3년을 임기로 활동하는 UN인권이사회 산하 조직이다.

정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실무그룹은 각 정부 부처, 옥시·삼성전자 등 대기업, 국가인권위원회, 공공운수노조 등 노동조합 등 기업의 인권 보호 문제와 관련된 이해당사자 30여 명을 면담하며 이행지침 준수 여부를 조사했다. 이들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전국금속노동조합 유성지회, 삼성 반도체 공장 직업병 피해자, 메탄올 급속중독 실명 피해자, 현대중공업 하청지회 등 기업 활동으로 피해를 겪은 이들을 직접 만났다.

실무그룹은 현재 기업이 인권 이행지침을 어기는 문제점과 부처 간 긴밀한 협력이 안 되는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한국 정부·기업의 이행지침에 대한 이해도와 의지가 충분하다는 결론에 방점을 찍는 모습을 보였다.

단테 위원장은 총평을 통해 “한국이 기업과 인권에서 리더십을 보여주길 바란다. 한국은 분명히 기업과 인권 이행지침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반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서 “우리는 (정부와 기업에서) 좋은 의지, 이를 위한 기대감, 도전과제에 대한 이해, 개방심, 벤치마킹을 할 수 있는 좋은 사례도 보았고 긍정적인 변화를 확인했다. 한국은 이 분야에 대한 리더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아도 위원은 “(실무그룹은) 특정 기업을 조사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다. 한국 기업 내 문화와 기업의 원칙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정도 되는지 파악하러 온 것”이라면서 “대부분의 기업은 이행지침에 대해 분명히 이해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강조하고 있는 점은 기업과 인권 이행지침은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 책임이 함께 가야만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 지난 3월24일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서울시청광장 한복판에서 사측의 노조탄압으로 인한 고통으로 목숨을 끊은 동료 한광호의 분향소를 설치하지 못한 채 경찰에 둘러싸여있다. 사진=장슬기 기자.

이들은 △하청업체에 대한 원청기업의 인권 책임 강화 △해외 생산공장에 대한 인권 책임 강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 협력 구축 △이주노동자 인권 보호 지원 강화 △여성의 고위직 진출 독려 등을 과제로 지적했다.

특히 강조된 과제는 공급망에 대한 원청기업의 인권 책임 강화다. 이들은 “유엔의 이행지침의 원칙은 기업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 책임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공급망이 국외에 있든, 1·2·3차 하청이든 영향력이 미치면 원청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라며 “한국은 애석하게도 많은 기업들이 1차 하청업체까지만 책임진다고 말하고 또 책임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개별 기업이 책임을 회피하는 문제에 대한 입장은 원론적인 수준에 그쳤다. ‘현대중공업은 하청노동자 산재 사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한 기자의 지적에 단테 의장은 “예비보고서에 원·하청 구조에 대한 문제를 다뤘고 울산 현대중공업에 들러 직접 문제를 제기했다. 현대중공업 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맞고 공급망 책임을 법에 반영해야 한다”면서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경청하는 자세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단테 의장은 LG전자에 대해서 ‘이행지침에 대한 이해가 모범적’이라는 평가하기도 했다. 삼성·LG 전자는 지난 1~2월 3·4차 휴대폰 부품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파견노동자 4명이 메탄올 급성 중독으로 실명한 산재에 대해 원청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아 비판을 받아왔다. 삼성·LG 전자는 노동건강연대 등 질의서를 보낸 시민단체에 ‘1차 협력업체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왜곡된 평가가 아니냐는 지적에 단테 의장은 “면담 시 삼성전자는 1차 협력업체 한해 책임이 있다고 입장을 밝혔지만, LG전자는 UN 기업 인권 이행지침을 따르고 있고 기업의 영향력이 미치는 데 책임이 가야 한다고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면서 “(나는) 정책적 부분을 말한 것이고 실제로 이것이 이행됐는지는 확실히 조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부품 하청업체인 유성기업의 노조파괴 시도에 현대자동차가 개입됐다는 정황이 확인된 가운데, 유성기업에 대한 실무그룹 입장 질의에 대해 단테 의장은 “현대차는 우리가 모종의 조사를 나온 줄 알고 면담자리에 변호사를 배석했었고 자신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말했다”면서 “유엔 이행지침에 따르면 공급망에 영향력을 미치는 위치에 대해선 (현대자동차가 하청업체인 유성기업에) 책임져야 한다고 본다. 현대차가 보였던 반응은 국제 노동기준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2015년 10월5일 산업재해로 사망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 대한기업 소속 이정욱씨(29)의 장례식. 사진=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단테 의장은 기업의 인권 보호에 대한 정부 지원에 대해 “정부는 기업과 인권 이해지침에 대한 이해를 잘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상생 협력 부분은 굉장히 긍정적으로 발전된 상황”이라면서 “산업안전보건법과 환경법은 기업 인권을 잘 제도화한 진보적인 법이다. 정부 부처들은 (지침과) 격차가 있을 때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메탄올 급성중독 피해자의 산재보험 신청을 지원한 바 있는 박혜영 노동건강연대 노무사는 삼성·LG전자에 대한 실무그룹의 평가에 대해 “한마디로 기업과 정부의 거짓말에 속았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어 박 노무사는 “유엔이 기업의 책임을 전체 공급망에 있다고 여러 번 말한 부분은 다단계 하청 구조가 지배적인 한국사회에서 대기업의 역할을 깊이 있게 새겨볼 수 있는 지점”이라면서도 “현장과 기업의 현실은 괴리가 큰데 그 부분을 포괄적으로 보고 판단하기에 방문 시간이 많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과 LG는 이번 실무그룹의 방문을 통해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한국의 다단계 하청 구조에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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