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과장을 보태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정치부 기자들을 거짓말쟁이나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한 정치부 기자는 반기문 총장에게 험한 말을 해주고 싶을 정도라고 했다.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고 나서 이를 해석하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 '당혹스럽다'는 말을 남긴 것을 보고 정치부 기자들은 그의 별칭인 '기름장어'(교묘히 잘 빠져나간다는 뜻)의 의미를 재확인했다는 것에 위안을 얻어야할지 모르겠다. 

욕심없는 공직자의 이미지를 남기고 싶었던 것일지 몰라도 노골적인 대권 행보로 보일 수 있는 일정을 소화하고 '과장 해석하지 마라'고 훈계조는 말하는 것은 표변(豹變)의 정도가 심해서 뻔뻔하다는 표현도 모자른다. 

지난 25일 방한한 반기문 사무총장은 그야말로 광폭행보를 걸었다. 

첫 일정이었던 관훈클럽 간단회에서 그는 "내년 1월 1일 한국 시민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해 결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부 기자들의 뉴스는 정치인의 워딩을 소재로 삼아 해석하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발언은 유엔사무총장직 임기를 마치고 '결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행보를 걸을 것이라는 해석이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반 총장은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해 "내부에서 여러가지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해외에 보도되는 모습을 보면서 약간 창피하게 느낄 때가 많다"면서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 통합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반기문 대망론에 대해선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한다"고 했고,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도 "초등학교 때부터 아파서 결석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모두 '대권'을 키워드로 집어넣으면 자신의 통합지도자가 될 수 있고 건강도 자신있다는 발언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간담회 당시 조선일보에 따르면 한 참석자는 "뜻밖에 기대를 훨씬 웃도는 발언에 질문하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 작심하고 나온 분위기였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이어진 일정이 김종필 전 총리 예방이었다. 친박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반기문 총장이 DJP 연합의 주인공이었던 김종필 전 총리를 만난 것 자체부터 TK 세력과 연대한 충청권 대망론 띄우기라는 해석이 나왔다.

그는 또한 국무총리 출신 인사 6명을 만나면서 정치적 행보의 일정이라는 해석에 무게를 뒀다. 그뿐 아니다. 반 사무총장은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와 김광림 정책위의장, 홍문표 사무총장 대행 등 새누리당 현직 인사들을 만났다. 

그는 하지만 유엔사무총장의 공식 일정인 30일 '유엔 NGO(비정부기구) 컨퍼런스'에 참여한 것을 내세워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국제적 행사에 참여"했다며 기존 일정에 대한 해석을 싸그리 "방한 중 활동과 관련해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란다"는 말로 일축했다. 

반 총장은 "국내에서 행동에 대해 과대해석하거나 추측하거나 이런 것은 좀 삼가·자제해 주시면 좋겠다"면서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자신의 발언에 대해서는 "그런 내용이 좀 과대·확대·증폭이 된 면이 없잖아 있어서 저도 당혹스럽게 생각하는 면이 많다"고 말했다. 오히려 언론의 해석을 과잉이라고 돌려세우면서 자신의 대권 도전에 대해선 한발짝 빼는 모양새를 취했다.



반 총장은 "제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 이런 데 대해 많이 추측들 하시고, 보도하시는데 제가 무슨 일을 할 것인지는 저 자신이 제일 잘 아는 사람일테고 제가 결정해야 할 것"이라며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저는 아직도 7개월, 정확히 오늘로 7개월이 남았다. 제가 마지막까지 잘 마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위 말하는 자신이 한 행동과는 전혀 딴판의 말을 하고 있는 유체이탈 화법의 전형을 보여줬다.

"저의 국내 행동에 대해서 과대해석하거나 추측하는 것은 자제해달라"는 말이 먹히지도 않겠지만 그의 '정치적' 행보를 애써 언론의 과잉된 해석 탓으로 돌리면서 여론의 '간'을 보는 행동은 대권 후보로서 당당하지 못하다. 

처음부터 반기문 총장이 오해를 살만한 일정을 최대한 소화하지 않거나 과잉 해석되고 있다면 자신은 대권에 관심이 없다고 선언하면 될 뿐이다. 아니면 언론의 해석을 나무랄 일이 아니다. 반 사무총장의 발언과 행보는 출마를 입에 올리지 않았을 뿐이지 대권 도전을 기정사실화해놓고 자기의 구상을 밝히는 발언으로 받아들여도 충분한 내용이었다. 

오히려 반 사무총장이 유엔사무총장 임기 도중 노골적인 정치적 행보가 걸었던 것에 언론 탓이 아닌 자신의 경솔함을 인정하는 메시지를 남겼다면 정치인 반기문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한 언론인은 "반기문 총장이 대권주자로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언행을 보였다면 언론을 탓할 게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봐야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이런 식으로 언론의 해석을 폄훼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만 생각한다면 대권 후보로서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런 글을 남겼다.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자리는 출신국을 '대표'하는 것도 '대리'하는 것도 아니고, 유엔 사무국의 총괄 관리/책임자이자, 국가간 분쟁과 갈등의 조정/중재자라고 배웠습니다. 만약 일본 출신 사무총장이 임기를 남기고 일본에 가서 노골적인 대통령 출마 사전 정지 작업을 하고 있다면 한국 언론들은 다들 손가락질하고 난리 났겠죠? 특히 사무총장의 업무 수행에 불만이 있던 나라들에서는 뭐라고 생각할까요? 결국 퇴직 후 대선 출마하는 것 자체도 문제인데, 아무리 그래도 임기 '중'에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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