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의사다. 부산의 봉생병원 원장이었고, 신경외과 전문의로 이름을 날렸다. 소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매진했다가 지난 1996년 총선에 출마해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정치인 초년 시절 정 전 의장은 이색 출마자로 거론됐고, 한동안 '의사 정의화'가 국회의원이 됐다는 타이틀이 붙었다. 

실제 정의화 전 의장이 의원 임기 도중 의사의 실력을 뽐낼 때가 있었다. 지난 2000년 1월 6일 한나라당 부총재를 맡고 있었던 권익현 의원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윤한도 의원과 바둑을 두던 중 쓰러지는 일이 있었다. 마침 정의화 전 의장은 국회 회관 사무실에 있다 권 의원 비서관으로부터 응급 상황을 전해듣고 권 의원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정 전 의장은 권 의원의 맥박이 정상이라는 점, 의식을 잃기 전 구토를 했다는 점을 미뤄 뇌출혈로 진단했다. 정 전 의장은 권 의원의 머리를 뒤로 젖히고 기도를 확보하는 등 응급조치를 하고 여의도 성모병원에 연락해 수술 준비를 요청했다. 병원에 도착해 권 의원의 상태를 검사한 결과 정 전 의장 말대로 뇌출혈 진단이 나왔고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정 전 의장은 직업으로서 의사의 삶을 정치에 비유해왔다. 치료가 필요한지 아니면 수술이 필요한지 의사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처럼 정치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결단을 내려야 될 때가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지난 25일 의장 퇴임 기자회견에서 정 전 의장은 자신의 '결단'을 밝혔다. 

"협치와 연대의 정치개혁, 국민중심의 정치혁신에 동의하는 우리 사회의 훌륭한 분들과 손을 잡고 우리나라 정치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 수 있는 중도세력의 '빅 텐트'를 펼쳐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되고자 한다"

정 전 의장의 '결단'은 새누리당으로는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그는 "새누리당이 정말 대오각성해서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당으로 그래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무능한 보수, 나태한 보수, 권위주의적 보수 정말 삶에 있어 어렵게 사는 국민 위한 따뜻한 보수 하지 못하는 그런 보수로 계속 인식된다면 자동 입당이 된다 해도 탈당할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새누리당이 현재의 모습을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표 확장력을 보장할 수 없고 제3지대 중도신당 창당과 같은 정계개편만이 정권 창출의 길에 한발짝 다가갈 수 있다는 게 정 전 의장의 생각이다. 

정 전 의장은 퇴임 기자회견 하루 뒤인 26일 싱크탱크인 '새한국의비전'을 출범시켰고, 27일 국회 개원 기념식 축사에선 유례없이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며 잠재적 대권주자로서 자신을 부각시켰다. 

▲ 2015년 2월4일 당시 국회의장을 지냈던 정의화 전 의원(오른쪽)과 유승민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완성을 위한 또 하나의 비단길 황해-실크로드 익스프레스 대토론회’에서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는 역대 의장 중 정치적 존재감을 가장 확실히 드러낸 의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오히려 야당으로부터 ‘원칙을 지킨 의장’, ‘행정부의 일방독주를 막은 의회주의자’라는 칭찬을, 새누리당 내부에선 ‘의장 자리를 본인의 정치를 위해 이용한다’(김도읍 새누리당 의원)는 비난을 들었다. 

좋든 나쁜든 정치인에 대한 평가 여부는 존재감을 인정받을 때가 나온다. 다만 국회의장으로서 평가를 뛰어넘어 정치인으로서 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제2 정치 행보를 시작한 정의화 전 의장이 국회의장이라는 계급장을 떼고 정치적 대중성을 얻을 수 있느냐 혹은 정치적 확장성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해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정 전 의장은 제2의 정치 행보를 예고한 바 있다. 두달 전인 지난 3월 30일 총선을 2주일 앞두고 정 전 의장은 국회의장 직위에서 벗어나 비난을 받을 수 있는 폭탄 발언을 내놨다. 

정 전 의장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정치를 바로 세워야 하고 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공천을 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사천을 하니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새누리당 공천 파동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면서 "국회의장까지 한 사람이 편하게 살겠다고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다. 새로운 정치질서를 위해 무엇인가를 고민해 보기 시작할 것"이라며 정계개편을 예고했다. 중도세력의 확장과 신당 창당 가능성을 열어놓은 싱크탱크 '새한국의비전'도 일찌감치 구상해온 정치결사체를 현실화한 것이다. 

사실 정 전 의장은 올해 1월까지만해도 4월 총선에 출마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의장 측 설명에 따르면 정 전 의장은 지난 1월 종합일간지 데스크들과 식사를 함께한 자리에서 새누리당이 험지 출마를 요청한다는 전제 아래 광주 출마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광주 지역 시민단체로부터 요청도 들어왔다고 한다. 광주에서 6선에 성공할 경우 동서화합을 내세워 '큰 정치'를 하겠다는 뜻도 있었다. 

정 전 의장은 전북 전주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하며 호남의 열악한 발전상을 지켜보고 동서화합의 뜻을 키워왔다고 한다. 영호남 교류사업의 일환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목포 하의도 분교와 부산 지역 학교 결연 맺기 등의 사업도 해왔다.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에 찬성했던 정 의장은 지난해 한창 논란이 됐을 때 5. 18 기념식에 참석해 김무성 대표 옆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화제가 됐다. 당시 사흘에 걸쳐 님을위한행진곡을 연습했다는 후문이다. 광주 출마는 동서화합 행보를 걸어왔던 자신의 행보와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오래된 지역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는 상징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의 구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지난 1월 21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최근 사석에서 한 발언"이라며 새누리당 핵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당의 요청과 상관없이 정 의장이 4. 13 총선에서 광주 출마를 고려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동아일보는 "새누리당으로선 정 의장의 ‘불모지 도전’을 응원해야겠지만 속내는 복잡하다"면서 국회선진화법 개정에 부정적인 뜻을 피력했던 정 의장을 비판하고, 광주 출마에 부정적인 새누리당 당내 의견을 강조했다.

나아가 동아일보는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이 '안철수당'으로 간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이면 해임해야 한다"는 새누리당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의 말을 전하면서 "여권 일각에선 박 사무총장이 국민의당으로 옮기면서 '정 의장도 모셔갈 수 있다'는 추측성 전망까지 나온다"고 보도했다. 

결정타는 이틀 후인 23일 정의화 의장이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를 향해 "자꾸 그렇게 말하면 천벌을 받는다. 길 갈 때 차 조심하라고 그래"라고 말했다고 알려졌다는 조선일보의 보도였다.조선일보는 22일 오전 출근길 국회 정문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 같은 말을 했다면서 "헌법기관 수장으로서 의원에게 할말이 아니다는 지적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험지 출마 요청이라는 전제 아래 신중히 검토했던 광주 출마가 별안간 새누리당의 국회선진화법 개정에 협조하지 않은 정의화 전 의장의 욕심으로 변질되고, 전혀 생각지도 않은 국민의당까지 거론돼 불쾌감을 드러낸 것이 고스란히 언론에 노출되면서 '독불장군'이 돼버린 것이다.

▲ 정의화 전 국회의장. 사진=노컷뉴스


결국 정 전 의장은 25일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제 지역구인 부산 중‧동구는 물론 동서 화합 차원에서 권유가 있었던 호남 등 다른 지역에 출마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며 "헌법과 법률에 따라 그저 주어진 일을 하고 있는 국회의장을 더 이상 흔들지 말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정 의장의 측근은 "당시엔 안타까운 일이었다. 광주 출마 시나리오가 전혀 불가능한 게 아니었지만 오프더레코드로 험지 출마 요청이라는 전제를 달고 사석에서 얘기했던 내용이 한참 뒤에 기사화되면서 부담을 느꼈고 타격이 크다고 생각해 불출마 선언을 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광주 출마가 좌절되면서 정 전 의장은 앞으로 정치에 깊게 관여하지 않고 거리를 두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5월 의장 임기가 끝난 후 동서화합을 주제로 한 연구소 설립을 준비 중이었고, 독일 유학도 고려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정 전 의장을 다시 정치권으로 불러세운 것은 새누리당이었다. 새누리당의 친박 공천 학살이 횡행했고 이를 비판했다. 그리고 그가 경고한대로 새누리당은 참패를 당했다.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위한 핑계일 뿐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현재 새누리당의 상황을 보면 정 전 의장의 제2 정치 행보는 명분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 보수에 가깝다. 어느 특정 당내 계파에 속하지 않은 점은 단점이면서 강점으로 통한다. 친박 공천 학살이라는 비판에 자유로웠던 것도 계파색이 옅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중성이 크지 않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가까운 정치권 인사는 정병국, 유승민 의원 등이다. 

정 전 의장은 개헌에 뜻을 두고 있다. 지방분권 개념을 헌법에 반영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고 진보정당이 주장하는 석패율제와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에도 긍정적이다. 정 의장이 중도세력 확장을 위해 '개헌'을 모멘텀으로 삼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것도 당내 기반이 작고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은 가운데 중도 신당의 확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카드로 개헌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정 의장의 첫 정치적 시험대는 새누리당 탈당이다. 탈당 선언이 임박할 쯤 머릿 속에 구상한 정계개편의 밑그림이 나올 수 있다. 유승민 의원을 포함해 잠재적 대권주자와의 연대는 정의화발(發) 정계개편의 돌풍이 될 수 있다. 

'새한국의비전' 발기인 겸 창립회원에 국민의당 김동철 의원이 이름을 올린 것도 주목된다. 호남 기반의 국민의당과 TK 돌발 핵심 변수인 유승민 의원, 부산 출신인 자신과 삼각 연대 고리를 만들면 제3지대 중도 정당의 파괴력이 폭발하면서 기존 정당을 뒤흔들 수 있다. 

정 의장은 28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신당 창당 가능성에 대해 "현재로선 10~20%"라면서 대권 출마 여부에 대해선 "아직 뜻이 없다. (킹) 메이커 역할을 해야 되지 않나 싶다"고 밝혔다. 현재 정 의장은 킹메이커의 역할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대권 후보로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퇴임 기자회견에서 "서태지만 잘한다고 성공했겠냐, 아이들이 있었으니 가능했던 것"이라며 "특출난 한 사람이 아닌 더불어서 잘 할 수 있는 그룹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서태지’가 될 수도 있고, ‘아이들’이 될 수도 있다. 

정의화발 바람이 돌풍이 될지 미풍에 그칠지는 오는 10월쯤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정 의장은 지난 19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6월 한 달은 쉬고 9월까지 생각했다가 10월쯤 다시 여러분을 볼 기회가 있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약 석 달 동안 자신의 정치적 실험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에 돌입하겠다는 얘기다. 정의화 의장 측근도 '정치적 혼란 시기'를 벗어나 오는 10월 어떤 식으로든 정 의장의 '도전' 선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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