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당선자 여러분. 제발이지 싸우지 마세요. 머슴들이 싸움하면 그 집안 농사 누가 짓습니까.”
“저는 말레이곰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요. 자꾸 도망다니지 말레이~.”
“김주하 앵커, 우리도 빨리 짜장면 한 그릇씩 먹고 오자고요.”
“가수 비가 군대를 간다고 하는군요. LA갈비가 아니라 군대갈비군요.”

그렇다. 신경민 이전에 최일구가 있었다. MBC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 최일구. 2003년 10월,  최일구가 처음 클로징 멘트를 시작하자 언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이를 테면 이런 비판이 있었다.

“뉴스의 기본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해 시청자들에게 판단의 기회를 주는 것이지, 앵커의 판단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앵커가 뉴스 프로그램 전반을 지휘하는 외국과 달리 기자들의 취재 내용을 전달하는 국내 앵커 시스템에서 앵커의 논평은 자제돼야 한다.”

그러나 최일구는 최근 출간한 ‘인생 뭐 있니?’에서 이런 주장을 반박한다. 미국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는 앵커로 평가 받았던 CBS의 월터 크롱가이트는 베트남전을 취재하고 돌아와 이런 멘트를 남긴다.

“이 참담한 전쟁을 끝내야 합니다.”

외국은 되고 우리나라는 안 된다는 논리도 이상하지만 애초에 앵커가 자기 생각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아무런 근거도 없다. 최일구는 우리나라에도 이미 1970년대부터 주장 저널리즘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군사독재 시절 TBC의 봉두완 앵커는 늘 이런 말로 뉴스를 끝냈다.

“TBC 뉴스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늘의 세계, 깜깜합니다.”

암울한 시절, 이심전심으로 국민들의 울분을 달래던 클로징 멘트였다.

최일구가 처음 뉴스를 진행했던 건 2003년, 입사 17년 만이었다. 최일구는 자신을 남이 쓴 원고를 영혼없이 따라 읽는 앵무새형이 아니라 뉴스를 뜯고 씹는 독수리형으로 설정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최일구가 정한 컨셉은.
1. 다른 앵커와 전혀 다르게 한다,
2. 구어체가 아니라 대화체로 한다,
3. 시청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였다.

나중에 세 가지가 추가된다.
1. 앵커는 뉴스를 파는 세일즈맨이다,
2. 초등학생도 뉴스를 보게 만들어야 한다,
3. 웃기는 뉴스를 전할 때는 시청자를 웃겨 보자.

최일구의 클로징 멘트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건 단순히 국내에 생소한 주장 저널리즘을 시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닭살 돋는 멘트를 천연덕스럽게, 요즘 말로 하면 허를 찌르는 ‘아재 개그’를 지상파 방송에서 구사했기 때문이다. 잔뜩 무게 잡으면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별하고 규정하는 앵커가 아니라 말을 건네고 의견을 구하는 옆집 아저씨 같은 앵커는 처음이었다. 무게와 권위가 없다는 비판도 많았지만 그게 또 최일구의 경쟁력이었다. 뉴스가 재밌다는 사람들이 늘었고 시청률도 크게 뛰어올랐다.

“현빈씨의 본명이 김태평이었군요. 현빈씨의 입대로 서해안이 무사태평했으면 좋겠습니다.”
“짱구들은 이러다 노름에 중독되고 맙니다. 오징어는 말려도 짱구는 못 말리는군요.”
“물가 인상 불똥이 이젠 애들 먹는 과자에까지 튀는 형국인데요. 눈만 뜨면 인상, 인상, 인상입니다. 인상 쓰게 만들죠?”
“보도할 기자 이름도 마음이 충만하다는 뜻인가요? 심충만 기자입니다.”
“내일은 제가 잘 모드겠는데요. 심형래씨를 인터뷰합니다.”
“축구 국가대표팀이 오늘 오만을 5 대 0으로 이겼습니다. 오만을 이겼다고 오만해져서는 안 됩니다.”

최일구는 이 책에서 억울함을 털어놓는다.

“내가 웃기게 한 것은 1%에 불과하다. 뉴스에서 웃기게 멘트하는 앵커를 처음보니까 시청자와 네티즌들이 놀랐고 그것이 전체인양 굳어진 측면이 크다고 본다. 나는 나 스스로를 내세우기 위해 튀는 멘트를 하지 않았다. 나는 뉴스진행을 하면서 쇼를 하지 않았다. 뉴스의 품격을 최소한 유지하는 선을 고수하면서 고뇌에 찬 멘트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최일구의 영광의 순간은 2012년 2월로 끝난다.

그해 1월 후배 기자들이 먼저 파업에 들어갔다. 방송이 끝나고 최일구가 문지애 앵커에게 물었다.

“지애씨도 내일부터 파업에 들어가는 거야?”
대답은 짧았고 단호했다.
“네. 방법이 없잖아요.”

그리고 한 달 뒤 최일구도 파업에 동참한다. 입사 27년차 부국장급 간부의 파업 동참은 투쟁 열기를 끌어올렸다.

▲ 경향신문 2012년 3월6일 1면.
2012년 3월6일 아침 경향신문 1면에는 빗속에서 울먹이며 구호를 외치고 있는 최일구의 얼굴이 클로즈업돼 실려 있었다.

최일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과연 이 자리로 내가 언제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짧게는 두 달 길게는 석 달로 봤다. 그러나 모두 틀렸다. 그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앉았던 자리에 가보지 못했다.”

이 책의 책 날개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2012년 2월23일 이후 우리는 그의 뉴스를 다시 보지 못했다.”

최일구는 두 차례 정직을 당하고 결국 사표를 낸다. 빚 보증을 잘못 서 퇴직금을 다 털리고 개인회생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파산 신청을 하고 면책을 받았다. 사기 혐의로 검찰 기소까지 당했고 공황장애로 병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최일구는 “지금까지 쌓아올린 나의 명예가 하루 아침에 구겨져 휴지통에 처박혔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지난 5년이란 긴 시간 동안 웃어본 기억이 한 차례도 없었다”는 대목에서 그가 겪었던 역경을 여럼풋이 짐작할 수 있다.

CJE&M으로 옮겨가 SNL코리아에서 앵커 비슷한 역할을 맡기도 했지만 2회 만에 막을 내렸다. 애초에 tvN이 보도 채널이 아닌데다 가뜩이나 CJ는 회장이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사적 성격의 프로그램을 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유머를 잃지 않고 살았던 쾌활했던 성격은 어느새 겁많고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밤이 되면 한 잔의 술에 의지해 타협하고 용기를 북돋운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절망한다. 좌절감이 또 밀려온다. 다시 막막한 현실과 직면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해 봄 최일구 앵커가 파업에 합류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지 않고 MBC가 지금처럼 만신창이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최일구를 TV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최일구는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좀 더 성숙하고 깊이 있는 클로징 멘트를 쏟아냈을 것이다.

최일구가 처음 입사했던 1985년 보도국 부국장이 수습 기자들을 모아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요즘 언론 상황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중이 절 싫으면 누가 떠나야겠습니까. 절입니까. 중입니까.”

한 마디로 “알아서 기어”라는 엄포였고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6월항쟁을 거치면서 MBC 기자들이 성난 시위군중에게 몰매를 맞는 일까지 벌어졌다. 1987년 11월 MBC 기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이듬해 8월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그해 7월 책상위에 뛰어올라가 성명을 낭독한 사람이 최용익 전 논설위원이다. 최일구는 성명서를 인쇄하는 데 참여했다는 이유로 라디오편집부로 쫓겨났다.

27년이 지나 다시 MBC 기자들이 집회현장에서 두들겨 맞는 시대가 됐다. 부국장이 된 최일구는 후배들에게 절이 싫으면 떠나라고 하지 않고 함께 파업 전선에 뛰어들고 결국 함께 절을 떠났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사랑하는 MBC 후배들이여, 힘들내라, 시간은 정의의 편이다.”

[MBC의 눈물] 최일구, 손석희, 박혜진… 그들은 왜 MBC를 떠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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