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강남은 욕망의 이름이다.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해 특권을 형성한다는 이유로 강남 밖의 사람들은 강남을 미워한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강남에 속하고 싶어 한다. 강남은 부정하면서도 선망하는 욕망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

도시연구자 한종수, 계용준, 강희용의 신간 <강남의 탄생>은 강남이 대한민국 사람들의 욕망으로 자리 잡게 된 과정을 추적한다. 지금 우리가 ‘강남’이라 부르는 지역은 1963년 이전까지 소달구지가 지나다니는 논밭이었다. 그런 강남에 대단지 아파트, 대법원과 경찰청 등 정부기관, 대형교회가 들어섰고 ‘8학군’이 형성됐다.

강남 개발사에는 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첫 번째 굴곡은 ‘남북분단’이다. 1960년대 인구의 급증으로 서울(지금의 강북지역)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정부는 도심 기능을 분산시키고자 한다. 그 대안이 강남이었다. 저자들은 한국이 만약 분단국가가 아니었다면 국토의 전통적인 중심축인 서울-개성-평양 축에 있는 은평, 고양, 파주 쪽이 강남보다 먼저 개발되었을 것이라 말한다.

남북분단은 지금의 강남을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나아가 1960년대 후반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사건 등으로 한반도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이면서 박정희 정권은 서울 인구를 분산시키고 유사시 피난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강남 개발을 선택한다.

강남에 최초로 들어선 아파트는 1971년 완공된 논현동 22번지의 공무원아파트였다. 이후 강남에 대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강남구가 형성됐다. 이 시기 강남이주를 촉진한 요인은 1975년 4월 남베트남의 붕괴였다.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인들에게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은 “유사시 한강을 어떻게 건너지?”라는 고민을 던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 굴곡은 민주화다. 1970년대 초 시작된 명문고의 강남 이전 정책의 배후에는 4.19혁명과 6.3학생운동에 대한 두려운 기억이 있다. 학생들의 힘을 알고 있는 권력집단에게 청와대와 중앙부처 가까이에 있는 서울대학교와 고등학교들은 매우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이는 사립대의 지방 캠퍼스 이전 정책과 맞물린다. 정권은 학생운동권의 약화를 노리고 지방으로 사립대를 흩어놓으려 했다. 운동권이 약했던 여대는 지방캠퍼스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 정부의 의도를 반증한다.

▲ 강남의 탄생 / 한종수, 계용준, 강희용 저 / 미지북스 펴냄

세 번째 굴곡은 97년 외환위기다. 강남 밖의 사람들과 강남이라는 욕망을 이어주는 기제는 사교육이다. 강남 밖의 사람들은 강남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식을 강남의 학원에 보낸다. 저자들은 대한민국 사교육의 성지 대치동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평생 직장의 개념은 무너지고 이를 목도한 세대는 믿을 것은 자기 자신 뿐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대치동 학원들은 이들에게 ‘명문대 진학’이라는 현실적 목표를 손에 쥐어줬고 2000년대 들어 공교육을 흔드는 괴물이 됐다.

강남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반영인 동시에 대한민국 현대사에 몇 가지 신화를 남겼다. 그 신화 중 하나는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강남 개발은 온갖 특혜로 얼룩졌다. 유신의 실력자인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은 부동산 투기의 원조 격이다. 업자들에게 정보를 흘려주고 이들에게 받은 돈을 정권 유지를 위한 자금으로 썼다.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은 수서, 일원 일대 개발을 위해 노태우 대통령에게 100억 원을 줬다.

또 다른 신화는 ‘강남불패’다. 강남 부동산 소유자들이 정부 정책을 결정하고, 강남의 집값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강남은 부동산과 교육의 힘으로 금수저를 재생산한다. 강남 밖의 사람들은 강남 밖에서도 잘 살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강남에 들어가고자 한다.

강남에 들어갈 수 없다면 또 다른 강남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불었던 뉴타운 열풍이 대표 사례다. 강북 시민들은 강남을 만들어주겠다는 뉴타운에 집권여당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현상의 이면에는 ‘강남의 기적’의 주역이던 현대 경영자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이 있었다.

이 책은 강남이 개발되면서 사라져버린 옛 기억의 장소를 차근차근 돌아본다. 강남은 지대가 낮아 물에 자주 잠겼고, 대대적인 수방 사업이 강남 개발에 필수적이었다. 수방 사업의 하나로 한강변에 제방을 쌓고 강변도로를 만들며 한강변은 사라졌다. 1970년대 초 압구정동과 옥수동 사이에 있던 저자도는 아파트 대단지 건설을 위해 골재로 채취되어 사라졌다.

지금도 기억의 장소들이 사라지고 있다. 강남의 개발 방식이 성공사례로 부각되면서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등 광역시는 물론 인구 10만 명도 안 되는 소도시도 강남을 따라 도시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신도심을 개발해 시청, 법원, 방송국, 터미널 등 알짜 시설을 옮겨놓는다. 구도심에는 기차역과 전통시장만 남는다. 대부분의 지방 도시는 특징도 없는 붕어빵 도시가 되고 구도심은 죽어버린다. 강남이 남긴 욕망의 그늘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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