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이자 토요일인 14일 오전 7시. ‘화순군 고인돌축제, 지리산 피아골 피정, 재경숭일산악회...’ 사당역 1번출구 공영주차장은 봄꽃놀이 가는 관광버스들로 북새통이다. 그 많은 상춘객들 사이에서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비는 ‘생명과 평화의 밀밭 걷기’ 참가자들을 찾기란 의외로 쉬웠다. 그들의 가방에, 옷깃에 매달린 노란 세월호 참사 기억 리본 때문이었다. 국가가 국민을 구해내지 못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공권력의 살인적인 물대포에 쓰러져 183일째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을 그렇게 함께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6개월 동안 정부와 경찰은 그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고 가족과 백남기대책위에 담당검사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 있으며,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백남기 농민의 건강은 점차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다. 

그가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 올라오던 날 오전에 뿌렸다는 밀씨는 지금 수확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봄바람에 물결 치고 있을 누런 밀밭이 보고 싶어졌다. 고향 텃밭에서 일하고 계실 아부지를 만나러 가는 마음으로 백남기대책위가 준비한 '생명평화 밀밭걷기' 보성행 버스표를 신청했다.

▲ '생명평화의 밀밭걷기' 참가자의 가방에 매달린 세월호 기억리본과 백남기대책위의 뱃지.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서울지역 참가자 50여명은 두 대의 빨간 색 버스에 나눠 타고 7시 25분경 사당역을 출발해서 전남 보성 웅치면 부춘마을에 있는 백남기 농민의 생가와 밀밭으로 향했다. 1호차에 올라 가톨릭농민회에서 준비한 오존수로 세 번 씻어 껍질째 먹을 수 있는 사과와, 새벽에 만들어 온 따끈따끈한 호박떡 한 덩이, 종이봉투 안에 든 우리밀로 만든 웨하스, 건빵, 전병과자 등의 간식을 받아 들고 보니 건강한 우리 먹거리에 대한 귀중함이 새삼 크게 느껴졌다. 우리밀살리기운동에 매진했던 백남기 님과 이 버스를 함께 타고 가면서 두런두런 밀밭에 관한, 그의 귀여운 네 살 배기 손자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었다면... 하는 상상을 잠깐 해봤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선 참가자들이 한숨 푹 자고 일어나 휴게소에 들렀다가 다시 출발할 때, 버스 앞에 달린 큰 TV로 뉴스타파와 KBS의 ‘시사현장 맥’ 등이 경찰의 살인적인 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 시민의 사태를 다룬 보도영상들을 함께 감상했다. 완성도 높은 ‘시사현장 맥’을 왜 여태 못봤을까? 했더니 옆에서 알려준다. “광주 KBS예요.” 아...

▲ 전남 보성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뉴스타파'가 보도한 백남기 농민 관련 영상을 참가자들이 보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세편의 영상을 보고 가톨릭농민회 회원, 녹색당원, 다큐PD, 부산에서 하루 전에 올라왔다는 일반 시민 등 20여명의 1호차 참가자들의 자기소개를 쭉 듣고 나니 버스는 36주년을 맞는 5.18민주화운동의 땅 광주를 지나 보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남도 들녘은 모내기가 한창이고 부드러운 낮은 굴곡의 산엔 아카시아꽃이 지천이었다.

다섯시간 반 만에 도착한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 입구에 조금은 착잡한 마음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무색하게, 전남 가톨릭농민회 소속 풍물패의 흥겨운 가락이 참가자들을 맞이했다. 풍물패를 따라 골목을 올라가니 대나무숲을 뒤로 하고 앉은 소박하지만 따뜻함이 느껴지는 백남기 농민의 집이 나온다. 마당엔 그늘막과 깔개, 식탁 등이 차려져 있었고 참가자들은 가톨릭농민회와 동네에서 준비한 우리밀 국수 한 그릇과 어제 잡았다는 돼지고기 편육, 갓김치, 절편, 딸기, 막걸리로 늦은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6개월째 돌아오지 못하고 중태에 빠진 집주인을 다시 떠올리며 너무 맛나게 먹은 한 끼조차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건, 잔반을 버리러 가다 눈에 들어온 눈부시게 피어있는 낮달맞이꽃을 본 순간이었다. 

▲ 전남광주 가톨릭농민회 풍물패가 생명평화 밀밭걷기 참가자들을 맞이하며 백남기 농민의 생가로 이끌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 있는 백남기 농민의 생가.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밀밭걷기 참가자들이 백남기 농민의 생가 마당에 마련된 탁자에서 우리밀국수 등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백남기 농민의 생가 마당에 핀 낮달맞이꽃.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마루에 걸린 심청사달 (心淸事達-마음이 맑으면 일이 잘됨), 보가효우(保家孝友-효도하고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 집안을 보전하는 것), 흠숭천주(欽崇天主-하느님을 최고로 모시는 가톨릭신자의 자세) 등의 편액은 집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조용히 말해주었다.


2시에 밀밭걷기, 3시에 보성역 문화제. 일정이 빠듯했다. 150여명의 참가자들은 다시 풍물패를 앞세우고 그의 집 뒤쪽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밀밭으로 향했다. 조선시대 보부상들이 오갔다는 밀밭으로 가는 길 가엔 전국에서 보내온 200여 개의 현수막이 내걸렸고, 거기에는 살인적인 물대포를 쏜 경찰에 대한 책임자 규명과 처벌,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비는 문구가 가득했다. 곰솔과 산죽밭으로 둘러 쌓인 만평 정도의 밀밭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올라섰을 때, 수확을 보름 정도 앞둔 밀은 아직 푸른 빛을 띄고 있었다. 파종한 다음날부터 꼬박 6개월간 주인의 손길을 받지 못한 밀밭에는 키가 큰 사료용 작물인 라이그라스, 호밀, 보리뿐만 아니라 많은 잡초가 뒤섞여 자라고 있어서 어느 구석에서는 밀을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가 상상하던 밀밭과는 조금 달랐고 돌보아 줄 이 없는 밀밭은 슬펐다.

▲ 백남기 농민의 밀밭으로 가는 길에 내걸린 현수막.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백남기 농민이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하기 직전 파종한 밀밭이 추수때가 되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백남기 농민의 밀밭.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백남기 농민의 밀밭.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전망대에서 준비된 참가자들의 발언들이 이어질 때 나는 혼자 밀밭 가운데로 내려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곧 담배를 태우려는 한 남자가 걸어왔다. 그는 백남기 농민의 웅치초등학교 1년 후배이며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혼자 귀향했다고 말했다. 

▲ 백남기 농민의 웅치초등학교 1년후배 문영제 씨가 백남기 씨와의 인연을 얘기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뒤늦게 농사지으며 외진 동네에서 말동무가 없어 적적해 하던 남기 형은 ‘자네 은퇴하고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네!’라고 매번 말해 놓고, 막상 내가 지난해에 퇴직하고 내려오자 마자 이렇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소. 학생때 민주화운동하고 광주민중항쟁 때 유공자 지정도 됐는데 보상금도 마다하고, 우리밀 살리기운동하면서 주변에서 ‘도의원, 국회의원 나가보시라’해도 한사코 고사했었는데... 지금 상태로는 한두달 버티기도 힘들다는 말이 들립디다. 항생제가 더는 드는 것이 없다니까...”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사람들이 노란 리본에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기원하고 공권력 남용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글을 써서 밀밭 한 가운데로 줄지어 내려와 현수막이 걸린 줄에 리본을 매달았다. 밀밭 한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다시 백남기 농민의 생가를 거쳐 마을 입구에 세워둔 버스쪽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 참가자들이 백남기 농민의 밀밭을 걸어내려오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오후 3시에 보성역 앞에서 열린 생명평화 밀밭걷기 문화제.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차로 15분여 이동해서 도착한 보성역 앞에서 백남기대책위가 주최하는 문화제가 열렸다. 이틀전 네덜란드에서 날아온 백남기 농민의 막내딸 백민주화 씨는 “울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먼 거리에서 보성 시골까지 내려와주신 여러분께 우선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벌써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요, 한 번도 희망을 놓은 적은 없지만 절망적인 6개월을 보냈습니다. 다만 저희 곁에서 응원해주시고 함께해주시는 대책위, 시민 여러분 덕분에 지치지 않고 잘 버텨나가고 있지만 6개월이란 시간은 참 절망적이었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나고 보니까 저희 가족이 희망은 딱 하나라고 생각하게 됐는데 그건 20대 새 국회입니다. 저는 당 대표들이 병원에 찾아와서 약속했던 것을 절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과 더민주당 김종인 대표가 오셔서 이 문제 끝까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손잡고, 눈 마주치고, 약속하고 가셨습니다. 저희에게는 희망은 그거 하나뿐입니다. 그 약속 하나 믿고 있고 그것이 지켜질 때까지 기다리고 지켜보겠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자리 지켜주셔서 감사드리고 저희 가족도 지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 끝까지 함께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다시 서울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36주년 기념식 전 행사가 열리는 광주로 떠났다. 나는 백남기 농민보다 한 살 많은, 지금은 퇴직해서 고향 고흥에서 텃밭 가꾸기로 소일하는 아부지가 갑자기 보고 싶어져 보성발 벌교행 5시 기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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