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환영 전 KBS 사장의 뉴스개입을 폭로했던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자신의 징계무효소송 과정에서 길 전 사장의 일상적 9시뉴스 수정지시 내역을 기록해둔 이른바 ‘국장업무 일일기록(비망록)’을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2년 전 김 전 국장은 세월호 참사 직후 발생한 2014년 5월 초 사례만 폭로하면서 그 이전은 유추하면 될 것이라며 공개하지 않다가 이번 재판과정에서 1년 치 사례를 처음 제출했다. 이 ‘비망록’에는 길 전 사장이 KBS가 단독 취재한 국가정보원 댓글 관련 리포트를 뺄 것을 요구하고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성추행 사건을 톱 리포트로 다루지 말라고 지시하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두고 당사자인 길환영 전 사장은 미디어오늘의 취재 요청에 “사실무근이며 얘기할 게 없다”고 답변했다. KBS측은 법정에 제출한 참고자료를 통해 가공해서 작성했을 수 있으므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10일 미디어오늘이 입수한 김시곤 전 국장의 ‘보도국장직을 수행하며 작성했던 비망록’을 보면, 김시곤 전 국장은 2013년 1월11일부터 11월17일까지 모두 34건의 길환영 사장의 지시와 뉴스배치 과정을 담은 일지를 표로 작성했다. 해당 표는 김 전 국장을 비롯한 제작진이 작성한 9시뉴스 가편집안(큐시트) 내용과 사장의 지시에 의해 수정된 편집안(‘사장의 보도개입’)으로 나눠져있다.

비망록을 보면, 집권 초 박근혜 정부에 큰 타격을 준 윤창중 전 대변인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길 전 사장이 톱뉴스로 다루지 말 것을 요구한 것으로 나온다. 김시곤 전 보도국장은 비망록에서 “지난 2013년 5월13일 9시뉴스 제작을 앞두고 윤창중 사건 속보 5건을 1~5번째로 가편집했으나 사장이 ‘내일부터는 윤창중 사건 속보를 1번째로 다루지 말라’고 지시하고 이정현 정무수석도 전화를 걸어와 대통령 방미성과를 잘 다뤄달라고 주문했다”고 썼다. 김 전 국장은 이어 “제작 지연으로 ‘20대 여성 기내서 2번 성추행당해’가 1번째로 나가고, 윤창중 속보는 2~6번째로 보도됐다”고 기록했다.

▲ 길환영 전 KBS 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 지난 2014년 5월9일 KBS 신관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 연합뉴스
또한 KBS가 단독보도했던 ‘국정원 댓글 작업 11개 파트 더 있다’(2013년 8월10일) 보도의 경우 제작 전에 길 사장이 빼라는 요구도 있었다고 김시곤 전 국장은 기록했다. 비망록에서 김 전 국장은 “애초 ‘국정원 댓글’ 건과 정치부가 올린 ‘경찰 CCTV 조작-왜곡 공방’ 1건으로 균형을 맞춰 9시뉴스에 6번째와 7번째 뉴스로 편집했다”며 “그러나 정치부가 두 번째 아이템이 팩트와 달라 제작할 수 없다고 알려와 애초 단독보도 1건만 제작하려 하자 사장이 ‘그렇다면 둘다 뺄 것’을 요구했다”고 썼다. 김 전 국장은 “이 건을 방송하지 않을 경우 기자들을 통솔할 수 없다고 버텨 보도 순서를 6번째에서 14번째로 내려 겨우 방송했다”고 기록했다.

김 전 국장은 이 같은 내용의 비망록을 징계무효소송 재판중인 지난달 12일 법정에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비망록 내용의 진위여부 등에 대해 KBS 홍보팀 관계자는 10일 “김시곤 전 국장과 길환영 전 사장 사이에 있었던 일이니만큼 당사자들에게 확인하라”고 밝혔다.

길환영 전 KBS 사장은 10일 미디어오늘과 전화통화에서 “그런 (지시를 한) 사실이 없다”며 “그에 대해 할 얘기가 없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KBS측은 김시곤 전 국장과 재판 선고 직전에 제출한 참고서면에서 비망록에 대해 “원고측이 가공해서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법원에 냈다고 김시곤 전 국장이 10일 전했다.

김 전 국장은 지난 2014년 5월 길환영 전 사장의 보도개입을 폭로했다가 그해 11월 정직 4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해 징계무효소송을 냈으나 지난달 29일 1심 재판에서 패소했다. 


▲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 지난달 법정에 제출한 국장업무일일기록(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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