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세계는 노예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저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통해 ‘근로(勤勞, 부지런히 일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노동자가 회사의 주인인적이 없는데 노동자들은 회사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한다.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은 주인이고, 주인의 일을 하는 사람은 노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의무다. 실력 있는 수많은 실업자들이 회사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 직장이 있는 건 축복일 수밖에 없다. 다수가 선망하는 대기업에 다니는 노동자에게 “차사면 시작이야. 결혼해서 애라도 낳으면 끝이지” 등의 말을 많이 듣는다. 퇴사하기 어려운 조건이 갖춰질수록 자본은 그 노동자의 노동 강도를 올린다.

러셀은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돼 왔다”고 지적한다. 임금노동은 자유로운 노예제다.

▲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지음

노동을 표현하는 다양한 말이 있다. ‘일 한다’, ‘돈 번다’, ‘회사생활 한다’와 같이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쉬운 말, ‘상품을 판다’, ‘강의를 준비 한다’, ‘아픈 사람을 치료 한다’ 등 자신의 업무를 구체적으로 지칭하는 말, 심지어 ‘자아실현 한다’ 등 노동이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가치에 관한 말 등이다. 하지만 다수는 “버틴다”는 단어로만 노동현실을 말한다.

자본은 부지런함의 도덕을 세뇌했고, 노동이 유일한 삶인 노동자들은 그 도덕을 받아들인다. 러셀은 “다수가 대의(그게 무엇이든 간에)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어야 하고, 많은 나쁜 사람들이 대의를 방해하니 더 많은 노력으로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우리에겐 정신적 여유가 없다”고 했다.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노동자들은 노동에 각종 의미를 부여한다. ‘업무상 갑질’을 하면서도 자신의 폭력성이 덜했다고 항변하거나, 자신의 일이 사람들의 효용을 증가하게 한다며 만족한다. 자신의 일이 사회를 진보하게 한다는 믿음은 정당함을 더한다.

일에 부여한, 일을 거부할 수 없게 하는 ‘의미’들을 통해 회사는 직원을 착취한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에서 상사 오차장이 인턴 장그래에게 “나는 왜 그렇게 일에 의미를 부여했을까? 일일 뿐인데”라고 한다. 이런 고민은 작품 속에만 있다.

노동권이란 말이 널리 쓰인다. 노동절마다 ‘노동은 권리’라고 외치지만 노동자 스스로 이 당위를 가슴에 새기지 못한다. 과연 노동은 권리인가? 권리란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처리하거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권리란 행사할 수 있지만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을 말한다. 노동은 권리인적이 있었나?

이쪽은 실업, 저쪽은 과로

노동에 정당한 권리가 없다는 사실은 노동시간을 봐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인타임’에서는 시간을 화폐처럼 사용한다. 일을 하면 시간을 받고 물건을 사면 시간을 지불한다. 시간이 다 떨어지면 심장마비로 죽는다. 부자는 급할 게 없고, 빈자들은 뛰어다닌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몸과 시간을 팔아 월급을 받는 게 노동자들의 숙명이다.

노동에 대한 보상은 시급으로 계산하고, 진보진영에서는 최저시급 1만원을 주장해왔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노동시간 1위라는 소식에 다수가 분노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주변에 쉽게 찾을 수 있는 ‘워커홀릭(일 중독자)’을 선망한다. 일로 자아실현도 해보겠다는 꿈을 품었던 사회초년생은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 말고는 삶의 기쁨이 없는 그들을 따라가고 있다.

노동을 향한 이런 이중적인 시선은 자본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생긴다. 러셀은 “오직, 타인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들만이 노동의 가치를 찬양한다”고 지적한다. 노동시간은 노동자들이 빼앗긴 삶의 시간이다.

노동자들은 일자리가 없어 장시간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본의 요구사항을 내면화한다. 러셀은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는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왔다”며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고 지적했다.

러셀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하루 4시간만 노동해도 생존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는 하루 3시간 노동을 권한다) 하지만 정작 기술 발전은 노동시간을 줄이지 않았다. 최신 개발된 각종 기기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직원을 직장에 연결한다. 기술은 강자를 위해 주로 쓰인다.

▲ 지난해 11월 드라마 '송곳'에 출연한 배우 김가은씨. 사진=정상근 기자

게으를 권리

게으름은 여전히 악(惡)이다. 놀이, 사변적인 행동 등은 그 자체로 무시당한다. 이익을 낳는 것만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관점만 남았다.

게으름을 죄악시 하는 것처럼 게으름 관련 논의도 쉽게 배제된다. 게으름은 ‘쓸데없는 짓’이고 게으름 관련 고민은 ‘한가한 생각’이다. ‘한가한 생각’이 사라질 때 노동의 주체성도 사라진다. ‘리로이 존스’로도 알려진 미국의 극작가 아미리 바라카는 “노예가 노예로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에 대해 어느 쪽이 더 빛나는지 더 무거운지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현대인들이 선망하는 직장은 노동시간과 관련하지 않고, 자신을 옥죄는 자본의 화려함에 있다.

가혹하게도 노동자의 게으름에만 비판이 몰린다. 국가나 자본권력이 낭비하고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로 포장된다. 러셀이 주장한 게으름은 단순히 반자본적인 의미를 넘어선다.

저자는 무기에 들어가는 과도한 비용(낭비)은 이웃나라에 대한 적대감과 비이성적인 이데올로기와 이에 동반되는 국가주의(애국심) 등을 통해 무마된다고 지적한다. 이웃나라를 북한, 비이성적인 이데올로기를 반공으로 이해하면 한국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이같은 원리로 자본과 국가의 낭비는 노동자의 성실함으로 보충하게 된다. 노동자가 노동에 중독된 상황에서는 이런 부조리에 관한 냉철한 비판의식은 사라진다. 러셀이 게으름을 향유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다.

일중독은 비판의식 뿐 아니라 사람 사이의 선의도 정지시킨다. 미국 한 대학의 심리학 수업에서 ‘착한 사마리아인 실험’을 진행했다.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도와달라’고 했을 때 어떤 집단이 가장 많이 도와주는지 파악하는 실험이었다. 실험결과 성별, 빈부, 인종 등은 실험에서 의미 있는 변수가 되지 않았다. 두드러진 차이는 시간이 많은 학생과 시간이 없는 학생으로 나눠진 것이다. 급히 다음 수업이 있는 사람들은 타인을 도와주지 않고 그냥 갔다. 

“인간의 선한 본성은 힘들게 분투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러셀의 말은 이런 의미다. 기존의 선악은 권력자의 기준이었다. 근로는 선이고 게으름은 악인가?

노동자가 잃어가는 것

노동에서 인간이 사라지고 돈만 남았다. 저소득층부터 고소득층까지 모두가 부를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일할 땐 초조하고 여가를 보낼 땐 찝찝하다. 

“기득권층은 노동자가 여가를 갖는다는 사실에 놀란다”고 러셀이 말한 지 한 세기 가까이 지났다. 여전히 현대인들은 일과 무관한 곳에서도 기쁨과 흥미를 쉽게 찾지 못한다. 그나마 존재하는 여가조차 수동적, 의존적으로 변했다. 대다수 여가는 또 다른 자본가에게 의지하는, 즉 다른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공간에서 일어난다. 게으름이 사라진 “현대 도시인들은 점점 수동적이고 집단적인 여흥, 즉 타인의 활동을 구경하는 쪽”으로 향할 뿐이다.

돈을 벌고 있는 상황에서도 사회를 뒤덮고 있는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것을 주제로 한 생각만 한다. 임금노동은 인생의 목표가 됐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을 천시하는 분위기가 퍼졌다.

기계와 경쟁하더라도 이기고 봐야 한다. ‘착한’ 노동자들은 게으름을 ‘퇴출해야 할 무언가’로 본다. 구조조정을 곧 해고로 인식하는 현실이다. 쌍용차 노조탄압, 공무원연금 개정 등에서도 보듯이 노동자가 고통을 부담하고, 노동자는 회사를 걱정한다. 일단은 열심히 하고 본다.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은 노동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일할 권리 뿐 아니라 일하기 위해서 배울 권리까지 포함한다. 노동권을 통해 노동자들은 돈을 벌 뿐 아니라 내면이 성장할 기회라 찬양한다. 그러나 노동자의 재교육 역시 자본의 허락 하에서 진행된다.

노동을 고민해야 할 노동조합에서 이같은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 노동자의 자아실현을 고민하는 노조가 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노조조차 노동력을 상실해 자본의 요구를 맞추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더 한다. 그간의 노동운동은 더 많이 일하기 위한 투쟁이었나?

무산계급(無産階級)으로 번역되는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는 ‘가진 게 자식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21세기 한국의 노동자들은 자식마저 쉽게 갖기 어렵게 됐다. 자신만의 시간도, 공간도, 취미도, 게으를 권리도 없는 노동자에게 남은 건 무엇일까.

 

※ 관련 추천도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

▲ 게으를 수 있는 권리/ 폴 라파르그 지음

칼 마르크스의 딸 라우라와 결혼해 유명하기도 한 폴 라파르그(1842-1911)의 저서로 ‘현대의 자발적 노예들과 고결한 미개인들에게 고함’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라파르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일에 중독돼 있고, 노동중독은 아편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과 다를 바 없다. 게으를 권리가 왜 소중한지 러셀의 저서와 함께 읽어볼만한 책이다.




‘노동을 거부하라!’

▲ 노동을 거부하라!/ 크리시스 지음
뉘른베르크에서 활동하던 좌파들을 중심으로 1986년 처음 결성한 그룹 크리시스(krisis)가 지은 책이다. ‘노동 지상주의에 대한 11가지 반격’이라는 부제처럼 저자들은 총 열한 장에 걸쳐 노동 지상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자본주의 상품생산 체제와 연루됐는지, 어떻게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까지 이어졌는지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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