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 역대 최악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비판 속에 치러진 선거였다. 그런데 여당이 졌다. 정부여당의 실정을 가려왔던 보수 성향 주류 신문·방송의 편파 보도 속에서 새누리당이 얻은 122석은 탄핵 국면이던 2004년(121석)처럼 참담했다. 정부여당을 비판해온 진보성향 주류언론도 예측 못한 결과였다.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에 따르면 새누리당이 질 수 없는 선거였다. 그런데 졌다. 이제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은 유효하지 않은 걸까. 아님 처음부터 잘못 설계된 담론이었을까. 4·13 총선 결과는 우리에게 ‘고정관념’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은 고령층 유권자 비율이 높고, 영호남 인구 격차가 크고, 보수편향의 언론환경 탓에 진보성향의 야당이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최장집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가 지난해 월간중앙과 인터뷰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야당이 선거에서 진 것을 변명하는 알리바이 만들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잘해도 구조가 기울어져 있어서 우리가 패배한다는 논리라면 뭐 하러 민주주의를 하나? 언제는 기득권을 가진 세력과 비주류가 평등한 적이 있었나?”라고 반문하며 비판했던 담론이기도 하다.

▲ 아무리 선수가 훌륭해도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으면 이길 수 없다. 지금껏 야당이 주장해온 내용이다. 사진은 만화 '슬램덩크'의 최강팀 산왕공고 선수들 모습.
정치 분석기사로 유명한 천관율 시사인 기자는 2014년 “한국 정치는 구조적으로 보수 우위가 공고하다. 여론 지형, 세대 분포, 언론 지형, 레드 콤플렉스, 동원 가능한 자산 등 보수가 크게 우세한 이유가 많다. 이 때문에 진보·개혁 진영은 늘 어려운 선거를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라고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을 소개한 뒤 “이 담론은 그동안 여권뿐만 아니라 야권에도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야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면 ‘기울어진 운동장’ 탓을 하며 정작 야당 스스로의 문제에는 직면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4·13 총선을 앞두고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은 꽤나 설득력이 높아보였다. 올 1월 행정자치부 연령별 통계에 따르면 60대 이상 유권자는 970만 명으로 최다 유권자층(전체 유권자의 23.1%)을 형성했다. 이들 대부분은 보수편향 종합편성채널의 주시청자들이었다. 50대 유권자도 19.9%를 차지한 반면, 30대는 18.3%, 20대는 17.6% 수준이었다. 19대 총선에 비해 20~30대 인구는 60만 명이나 줄었다. 이를 두고 조선일보는 “지난 10년은 30~40대 유권자들이 판세를 좌우해왔으나 앞으로는 60대 이상이 선거의 중요 변수로 부상할 전망”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선거를 앞둔 대다수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 메인 뉴스에선 ‘정권심판 여론’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KBS는 철지난 ‘북풍몰이’ 보도에 앞장섰고, TV조선 등 일부 종편은 막말을 섞어가며 야당을 조롱했다. 여기에 야당의 전통 텃밭이었던 호남은 둘로 갈라졌고, 서울-수도권에선 셋으로 갈라졌다. ‘다야 구도는 여당에 유리하다’는 절대명제와 유선전화 방식 여론조사를 통해 선거는 예측 가능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진보 성향 언론은 새누리당의 180석 또는 200석 가능성을 제기하며 보수 성향 언론보다 더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안수찬 한겨레21 편집장은 “기자는 점쟁이가 아니고, 정치 기사의 고갱이는 예측 기사가 아니다”라고 전하며 “총선 보도에서 드러난 한국 언론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의 원재료가 아니라 양식화된 자료만 베껴 쓴 데 있다”고 언론계의 성찰을 제안했다. 유승찬 소셜미디어 컨설턴트는 “거의 모두가 예외 없이 새누리 압승을 예상해 놓고 선거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과거의 신념에 근거해 또 결과를 재단하기 시작한다. 참 놀라운 재능이자 유체이탈”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빗나간 예측은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의 유효성에 의문을 던졌다. 보수 편향으로 언론 운동장이 기울었으면 여당이 선거에 이겨야 하는데 졌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을 유지하려는 일각에선 ‘위대한 민심이 주류 언론을 심판했다’는 레토릭을 선보였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어려울 때 등장하는 편의적 발상이다. 더욱이 심판의 주체인 시민들이 주류 언론의 의제 설정에 휘둘리지 않았음을 전제하기 때문에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은 이 경우에도 의미를 상실한다. 이 같은 발상은 ‘언젠가 심판은 도래한다’는 일종의 구원론적 태도로 비춰질 수도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진보진영의 ‘선동’이었던 것일까. 보수 성향 일간지의 한 기자는 “지금은 신문이 1면에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이슈를 장악하지 못한다. 네이버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어 맘먹고 기사를 배치하지 않는 이상 지금은 운동장이 기울어지기 힘들다”고 말했다.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은 진보 진영의 ‘엄살’이란 얘기다. 이 같은 반론을 의식했는지 한겨레는 최근 ‘새누리에 등 돌린 8인’ 심층좌담 기사에서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 지상파와 종편의 정권 편향성 등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에 대해서는 참석자 대부분이 공감했다. 이번 총선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평평해졌다고 보기는 아직 이르다고 참석자들은 입을 모았다”고 전했다.

한겨레의 보도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종이신문 유료부수, 방송사 메인뉴스 시청률, 네이버 온라인 노출기사 모두 보수 언론에 편향됐다. 주류 언론은 대통령의 선거개입 논란을 비판하는 대신 대통령의 ‘국회심판론’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했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통한 미디어 이용습관에 따라 유권자들의 상당수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벗어나 뉴스를 직접 선택해 수용하기 시작했다. 랜덤으로 기사를 읽더라도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며 여론을 파악하며, 종이신문 1면과 방송뉴스 메인 리포트라는 플랫폼 대신 페이스북 타임라인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정보를 획득한다. 스스로 정보의 균형을 맞추고, 나아가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골라 수용한다.

역대 최악의 ‘기울어진 운동장’
그러나 언론이 놓쳤던
‘기울어진 운동장’을 벗어난 사람들
진보도 고정관념 성찰 필요

▲ 3월18일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 입장하는 모습. ⓒ 연합뉴스
어찌보면 이번 선거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벗어난 사람들이 전면에 등장한 사건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21일 한국일보 칼럼에서 “정치적 공론장에서 종합편성채널(종편)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쌍봉형 구도의 전위대라 칭할 만하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종편과 SNS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중도층이 정치적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지금껏 기울어진 운동장의 양쪽 골대에서 득점을 위해 뛰는 사람들만 생각해오며 운동장 밖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의 전제는 모든 사람들이 운동장에 모여 있다는 것인데, 자의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운동장을 벗어난 사람들이 표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윤희웅 더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15일 영남일보 칼럼에서 “보수 우위의 언론은 대중의 기류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면서 힘을 잃고 말았다. 반면 젊은 층은 온라인과 SNS 등을 통해 언론 환경의 기울기를 교정해오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서울-수도권 선거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20~49 유권자의 경우 지상파3사 메인뉴스와 종이신문 플랫폼에서 가장 먼 뉴스수용자들이다. 2015년 언론수용자의식조사에 따르면 20대의 이동형 인터넷 뉴스 이용시간은 하루 평균 26.7분이었다. 반면 20대의 TV뉴스 시청시간은 평균 21.4분으로 인터넷뉴스 이용시간보다 짧았다. 60대 이상은 53.2분이었다. 여전히 군사정권 시절처럼 주류 언론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유권자는 존재할 수 있으나 그들은 이미 공고한 여당지지층으로 여론의 확장성이 떨어진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뉴스는 기호에 따라 소비되고 있다. 인기 정치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는 1편부터 99편까지 1억2075만1619회의 다운로드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했다(4월14일 기준). 한편 당 평균 100만 명이 넘는 유권자가 청취한 셈이다. 팟캐스트 진행자였던 노회찬 20대 국회의원 당선자는 “선거 과정에서 방문한 재래시장 가게의 60대 아주머니가 ‘노유진 잘 듣고 있어요’라고 말할 때 목이 메는 감동이 밀려왔다”고 술회했다. 추혜선 정의당 언론개혁기획단장은 “대선을 앞두고 뉴미디어의 영향력은 더욱 증폭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이번 선거결과만 놓고 주류 언론이 의제설정 능력을 상실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하다. 만약 나경원 의원 딸의 부정입학 의혹을 지상파 3사와 종이신문에서 다뤘다면 나 의원이 여유 있게 당선될 수 있었을까. 주류언론이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만들어낸 프레임은 여전히 투표결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상파 3사는 선거기간 동안 박근혜 정부의 실정과 여당에 대한 심판 여론을 메인뉴스와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주류언론이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제대로 보도했다면 새누리당은 100석 이하의 참패를 기록했을 수도 있다.

▲ 경기에 이기기 위해선 우리 스스로 흐름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 사진은 만화 '슬램덩크'의 장면.
하지만 기울어진 언론 운동장 담론을 통해 언론과 투표와의 상관관계를 주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며 추론이다. 이를 검증하는 과학적 연구는 제대로 진행된 적 없다. 이와 관련 최경영 뉴스타파 기자는 선거가 끝난 뒤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언론의 보도에 따라 투표의 결과가 달라진다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일반의 생각과 달리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밝히기도 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사실적 현상이지만 언론의 기울기가 곧바로 표심에 영향을 준다는 식의 도식적 접근은 이번 선거를 통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는 대중을 수동적 뉴스 수용자로 인식하는 소위 지식인들의 ‘우려’와 달리, 상당수 국민들은 ‘언론이 불공정하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뉴스를 다양한 통로로 균형 있게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군사독재 시절을 거쳐 지금까지 체화된 경험의 결과물이자, 스스로 삶의 질을 높이고 주체적 판단을 하기 위한 상식적 선택이다.

김동원 전국언론노조 정책국장은 “주류 언론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지만 젊은 뉴스 수용자들이 SNS에서 주류 언론을 가지고 놀았다. 이젠 더 이상 뉴스수용자들이 순진하게 뉴스를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윤희웅 센터장은 “더 이상 기성언론이 대중의 현실인식 형성을 독점할 수 없다. 기성언론을 통해서만 정보를 획득하던 습관은 점차 약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기성언론 입장에선 기존의 보도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유권자들이 원하는 뉴스를 전달하는 수밖에 없다.

정부여당 편향적인 뉴스를 내보내며 이번 선거처럼 민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경우 신뢰도는 더욱 곤두박질치고 뉴스는 소수 엘리트 집단의 자기만족 내지는 보고용으로 그 기능이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이 최근 연일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이유는 뉴스로서 ‘생존’하기 위해서다.

미국의 정치 평론가 월터 리프먼은 “공적 사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하나의 국면과 양상일 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진보 성향 언론 역시 선거 결과가 주는 교훈을 바탕으로 기존 고정관념에 대한 성찰과 재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보수 중앙 일간지의 한 중견 기자는 “대중은 언론의 선전선동과 무관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생각보다 현실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다양하다. 그런데 기자들은 진보·보수 모두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시켜 본다”고 꼬집었다. 귀담아 들을 대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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