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보도지침’은 다섯 인물이 법정에 서면서부터 시작된다. 피의자는 김주혁 기자와 김정배 월간 ‘독백’ 편집장이다.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 도구인 ‘보도지침 문건’을 세상에 폭로한 댓가는 컸다. 변호인과 검사는 둘의 유무죄를 다투고 판사는 네 명의 설전을 위에서 지켜본다. 선고가 내려지면서 공연은 막을 내린다.

연극 보도지침의 모티브는 1986년에 있었던 ‘보도지침’ 사건이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집권부터 노골적인 언론통제를 감행해왔는데 보도지침 문건은 그 증거 중 하나다. 보도지침은 ‘제목에 호헌, 개헌은 일체 넣지 말 것’, ‘검찰이 발표한 내용만 보도할 것’, ‘김대중 사진 쓰지 말 것’, ‘사회면 하단에서 취급할 것’ 등 보도 여부부터 편집방향까지 지시한 ‘비밀통신문’이었다. 당시 언론사 보도국엔 안전기획부, 기무사, 홍보조정실 등에서 파견한 정보원들이 상주하고 있었고 이들은 지침대로 신문이 편집됐는지를 검수했다.

▲ 연극 '보도지침' 포스터

보도지침은 1986년 9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월간 ‘말’지 특집호 ‘보도지침, 권력과 언론의 음모-권력이 언론에 보내는 비밀통신문’을 발행하면서 실상이 낱낱이 드러났다. 김주언 당시 한국일보 기자는 10개월 어치의 보도지침 문건을 입수해 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고 민언협, 말지 편집부는 비밀편집실을 마련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특집호를 발간했다. 폭로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 고 김태홍 민언협 사무국장, 신홍범 민언협 실행위원 등은 국가보안법 및 국가모독죄로 구속됐다.

연극 보도지침의 무대는 법정과 극장으로 번갈아 바뀐다. 김주혁 기자, 김정배 편집장, 황승욱 변호인, 최돈결 검사, 송원달 판사 다섯 인물은 모두 대학 시절 연극동아리에서 동고동락했던 관계다. 지도교수였던 판사를 제외한 넷은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거울’임을 외치며 연극을 배워가는 대학 새내기 동급생으로 만난다.

연극의 의미를 고민하던 이들은 결국 무대에 올리기 위해 불온서적을 공연작품으로 택하게 되고 교내 기관원에게 적발돼 고문을 받게 된다. “이제 어디로들 갈 건가?” 고문 후 이 질문을 들은 이들은 저마다 제 길을 찾는다. 검사는 정의, 변호인은 진실, 편집장은 ‘마음의 소리’를 찾는다 답했지만 기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후 같은 꿈을 꿨던 이들이 각기 다른 입장으로 법정에서 만나는 것이다.

연극 보도지침은 ‘마음의 소리’를 수차례 묻는다. 연극동아리 시절엔 ‘독백’을 배우면서, 법정에서는 ‘진실’을 물으면서다. 동아리 시절 이들은 “진실을 담은 말은 힘이 있다. 가장 진실한 말, 마음의 소리를 독백이라 부른다”면서 독백의 가치에 감동하고, 법정에서는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다”라는 말로 진실 보도를 얘기한다.

실제로 ‘마음의 소리’를 좇겠다고 나섰던 김정배는 ‘월간 독백’의 편집장이다. 1980년대 발행될 때마다 압수수색 당했던 ‘비합법 매체’ 월간 말지를 상징하는 독백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남영동 대공분실’, 대학생들의 거리투쟁을 보도해 쫓겨난 기자들이 만든 잡지다.

김정배는 “전두환 대통령이 순대를 먹고 있는 사진은 1면에 넣고 집회 후 종로3가를 청소하는 대학생 사진은 넣지 말 것”,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성모욕으로 쓸 것”을 요구하는 보도지침을 향해 한 마디를 남긴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20일, 전두환 군사정부가 광주에 계엄령을 내리고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현장을 보도하지 못한 데 따라 공동사직한 당시 전남매일신문 기자의 사직서 내용이다.

▲ 연극 보도지침이 공연되는 무대. 사진=손가영 기자

이들의 언론자유와 진실보도를 향한 믿음에 대한 검사와 판사의 대답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검사는 국가보안법 혐의 사건과 관련해 지금껏 정부가 보여온 논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판사는 적당히 현실과 타협한 균형감을 강조한다.

검사는 “국민이 알지 말아야 하는 국가의 작동원리는 있다”면서 “보도지침 폭로가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고 국가를 모독함으로써 국가이익을 훼손했다”고 주장한다. 검사는 ‘보도지침’을 ‘보도협조사항’으로, ‘성고문’을 ‘성모욕’으로, ‘뜨거운 (학생들)’을 ‘위험한’으로 정정하는 모습도 보인다.

판사는 “각자 조금만 인정하고 조금만 모른 척할 것”을 요구하며 검사와 변호인의 거리가 좁혀져야 한다고 말한다. 판사가 타협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균형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판사는 캠퍼스에서 전태일 열사 장례추모제를 주도할 정도로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왔지만 ‘못 입고 못 먹는’ 고문과 압박에 시달려오고 “적당히 개기고 적당히 악수하면서 알몸과 양복 사이에서” 삶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게 된 인물이다.

판사는 극 내내 검사와 변호인 주장 사이에 중간이 없음을 알면서도 거리를 좁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판사가 고발자에게 내리는 선고는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1년이다. 검사에겐 ‘무죄’이고 고발자에겐 ‘유죄’인 ‘균형잡힌’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실제 사건에서 김주언 기자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자격정지 1년을, 고 김태홍 사무국장은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연극은 ‘갈릴레이의 자서전’을 불온사상이라 불허할 정도로 언론통제가 극심했던 권위주의 정부의 단면과 당시 청년들의 고민, 그리고 그들이 사회로 나가 변모한 정체성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2시간 동안 밀도있게 보여준다. 이들이 재판과정에서 보여주는 언론자유에 대한 역설과 이를 훼손해도 된다는 방어논리의 공방전은 과거 이명박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위축돼 온 언론자유를 고민하게 한다.

균형을 선택한 판사는 선고 후 앞에 선 옛 제자들에게 다시 “이제 어디로들 갈 건가?”라고 묻는다. 검사는 ‘정의’를, 변호인은 ‘진실’을, 편집장은 ‘마음의 소리’를 선택하며 무대 뒤로 사라진다. 보도지침을 고발한 김주혁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묵묵히 있다가 모두가 사라진 뒤 관객을 향해 묻는다. “몰라서 묻나?” 관객을 향해 이 자리에 서서 어떤 결정을 했을지를 물어보는 듯한 질문이다.

연극 보도지침은 서울 종로구 동숭동 수현재씨어터에서 오는 6월19일까지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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