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9월 중순 대통령이 된 전두환에게 김종인이 첫 대면보고를 했다. 김종인은 스스로 더없는 기회라고 생각하며 준비한 자료를 들고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고 한다.

“기업 안에 노동조합 지부나 노조를 두는 것은 전근대적인 어리석은 짓이다. 노조는 노조대로 사회적 기능을 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노조 활동을 통해 사회와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어야 한다. 기업에 노조 지부가 있어서는 안 된다. 기업은 생산하는 곳이다. 기업 내에서 파업을 할 경우 생산시설을 보호하는데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똑부러지는 자기 주장이 마음에 든 것일까. 전두환은 보고를 받던 도중에 “지금 김교수가 말하는 것이 어쩌면 내가 생각한 거랑 똑같냐”고 찬동하기까지 했단다. 이어 주무부처 장관을 교육시켜 법을 만들어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김종인은 자신의 논리는 분명했다며 이렇게 얘기한다. “기업에는 노동조합원도 있고 조합원이 아닌 직원들도 있다. 따라서 기업 안에 노동조합을 두는 것은 절대로 안 되며, 노동조합 지부도 기업안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김종인이 그의 유일한 비망록인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동화출판사, 2012)에서 풀어놓은 얘기다.

김종인은 독일 사회를 통해 한국에서 시도할 만한 프로그램들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김종인의 조부인 김병로는 5.16쿠데타 이후 새 야당인 민정당을 창당했다. 김종인은 얼마 후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1973년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가 됐다. 김종인이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경제개발계획 실무위원 등을 담당하며 정책입안에 참여한 건 잘 알려져있다.

▲ 지난 3월 민주노총을 방문한 김종인 대표. 사진제공=더불어민주당
그런데 독일인들은 정말 이렇게 험악한 노조관을 갖고 있을까? 독일이 노조를 기업 내에 두지 않는다는 김종인의 주장이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독일은 기업 밖에 노조가 있되, 기업 안에는 종업원평의회(Betriebsrat)를 두고 있다. 기업 안에 있는 종업원평의회는 노조의 현장활동가들로 구성돼 있다. 노조와 평의회의 인적구성은 거의 같다. 말하자면 산별노조 형태의 기업 지부와 같은 형태인 것이다.

김종인은 노조를 기업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주장만 할 뿐이다. 우리의 노조 보다 훨씬 강력한 독일의 평의회에 대한 언급은 전두환 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일관성도 없다. 노조를 기업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전두환에게 고언할 때 김종인은 “노조는 노조대로 사회적 기능을 하게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고 썼다. 독일의 노조는 공동결정권제도를 통해 경영에 참여하며 주정부(한국에선 광역시도)와의 협상을 통해 사회 문제에도 적극 개입한다. 

그러나 김종인은 지난 3월 민주노총을 찾아가서는 “민주노총이 사회문제에 집착하다보면 근로자 권익보호는 굉장히 소외된다” “(노조가)사회 전반적인 활동으로 영역을 넓히느냐 하는 것이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사회문제에 개입하지 말고 임단협 같은 이해타산에만 신경쓰라는 얘기다.

기업 내에선 생산에 차질을 빚으니 노동조합을 용인해선 안 되고, 집단적 사회 참여도 문제라면 노동자들은 발바닥이나 긁고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

김종인의 ‘경제민주화’ 인식은 30년 케케묵었다

김종인의 보수성은 그가 경제민주화 조항(헌법 제119조 제2항)의 입안자로 불린다는 점에서 선뜻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김종인이 경제민주화 조항의 입안자라는 ‘주장’의 신빙성은 논외로 하자.(참고기사 : 김종인이 경제민주화 기수? 신군부 부역자들의 괘씸한 ‘거짓말)

그보다는 87년 경제민주화 조항이 탄생하게 된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케케묵은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6월 민중항쟁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이 타협책으로 내놓은 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다. 민정당과 야당이 내놓은 개헌안의 경제조항(각각 118조와 115조) ①항은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야당은 “국민경제의 균형(야당)”을 넣자고 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내용에선 민정당과 야당의 안이 확연히 달랐다. 야당안은 ②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 안에서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한다. ③ 독과점의 폐단과 경제력 남용에 의한 소득불평등의 시정 및 분배구조의 왜곡을 적절히 규제조정한다.④ 국가는 저소득층의 생활안정과 소득향상 및 복리증진을 위하여 적극적인 시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등 보다 진일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30년전인 당시만해도 ‘헌법’은 문서상의 규범에 불과하단 인식이 강했다. 그도 그럴것이 제헌헌법을 비롯해 1960년 11월에 개정된 4차 개헌 헌법까지 그 내용과는 무관하게 국민의 삶과 권리의 수준은 세계 최하위였기 때문이다. 또한 군부독재로부터 경제상의 자유를 실현하는 게 더 우선적이었는지 결과적으로 87년 헌법의 내용은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했다.

요컨대 경제민주화 조항은 여야의 타협과정에서 결국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재벌 규제라는 두가지 원칙만 남은 채 현재의 모습으로 형해화된 것이다. 이조차도 당시 개헌특위 전문위원이었던 이석현(현 더민주 의원)의 말처럼 “전두환 정권이 국민의 6월 항쟁에 항복해 이뤄졌기 때문에 개헌의 주도권은 야당이 쥐고 있었”던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헌법 뿐만 아니라 헌법에 대한 해석도 시대상을 반영한다. 현재 시점에서 ‘경제민주화’를 바라보는 국민의 상식적인 시각이나 국제사회의 보편적 인식에서 보면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기업 경영에 대한 그리고 정치적 결정에 대한 노동자 참여일 수밖에 없다. 이는 거창한 주장이 아니라 회사 경영에 있어 이해관계자인 봉급쟁이들의 목소리를 보장하고 또한 부자감세 같은 편향적인 정부 정책을 거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87년 경제민주화 조항의 입안자라는 김종인의 인식은 3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김종인은 그의 자서전에서 ‘경제민주화를 향한 정책 과제’로 노사관계 재편을 얘기하는데 여기서 김종인은 기업들이 임의로 정리해고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한 현행 노동법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일반 해고다. 그리고 노조를 재편해 기업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과거 자신의 세차례 시도가 모두 실패했지만 “더이상 시기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썼다. 김종인은 1980년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던 때와 여전히 같은 입장인 것 같다.

옛날 얘기가 아니다. 김종인의 인식이 국보위 시절에 머물러 있는 한 논란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외견상의 사과는 있되 개발독재 부역에 대한 성찰이 보이지 않는다. 총선 승리의 일성으로 내놓을만한 게 고작 기업의 구조조정을 돕겠다는 것 밖에 없는가? 열흘새 세 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현대중공업, 가습기살균제를 동물실험도 안하고 곧바로 인체실험을 한 재벌기업들. 노동자들의 표를 얻어 당선됐으면 기업살인에 대한 대책부터 내놓는 게 예의가 아닌가. 구조조정이 필요할 수 있다. 문제는 부실 경영과 관리 책임이 있는 경영진과 대주주, 정부 당국자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노동자들에게만 늘 희생이 전가된다는 점이다. 

기업에는 조합원이 아닌 직원도 있으니 노동조합 안 된다? 그놈이 그놈이다. 정말 진부하고 고약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