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씨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조세회피 목적의 페이퍼컴퍼니 3개를 설립한 정황이 뉴스타파 취재 결과 드러났다. 뉴스타파는 ICIJ(국제 탐사보도 언론인협회)와의 협업인 <파나마페이퍼스> 공동취재를 통해 페이퍼컴퍼니 설립 정황이 포착된 한국인 195명을 찾아냈고 이들 중 공적 보도 가치가 있는 인물에 한해 2차 보도를 예정해두고 있다.

뉴스타파는 4일 오전 서울 중구 성공회빌딩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파나마페이퍼스’ 프로젝트 중 뉴스타파가 자체적으로 취재한 ‘조세도피처의 한국인들 2016’에 대한 1차 결과를 발표했다. 입수된 문건 중 ‘Korea’로 검색되는 파일은 1만 5천여 건이며 이 중 한국 주소지를 기재한 한국인 이름은 총 195명으로 파악됐다.

‘조세도피처의 한국인들 2016’ 1차 명단 발표 대상으로 지목된 노재헌씨는 195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주소지가 홍콩에 등록된 노씨는 뉴스타파가 확보된 데이터 중 한국인 이름을 무작위로 찾던 중 발견됐다.

▲ 뉴스타파는 4일 오전 서울 중구 성공회빌딩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파나마페이퍼스’ 프로젝트 중 뉴스타파가 자체적으로 취재한 ‘조세도피처의 한국인들 2016’에 대한 1차 결과를 발표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파나마페이퍼스 프로젝트는 독일 언론사 쥐트도이체 자이퉁의 탐사보도 기자가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역외 탈세와 자금 세탁’ 분야에서 세계 5위권으로 평가받는 유명 로펌 모색 폰세카의 내부자료를 입수하면서 시작됐다. 유출된 문건은 1150만 건, 용량 2.6 테라바이트에 달하는 역대 최대 규모로, 1997년부터 2015년 말까지 생산된 조세도피처 회사 20만여 개의 설립 서류, 주주 및 이사 명부, 내부 이메일 기록 등이 포함돼있다.

ICIJ 주도로 영국 BBC, 프랑스 르몽드, 일본 아사히 신문 등 세계 76개 나라의 109개 언론사, 376명의 언론인이 지난 8개월간 공동 취재를 벌여왔고 한국 언론으로는 한국 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가 참여했다.

뉴스타파 취재에 따르면 노재헌씨는 지난 2012년 5월18일 조세도피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One Asia International Inc.’, ‘GCI Asia Inc.’, ‘Luxes International Inc.’ 등 회사 3개를 설립하고 주주 겸 이사에 취임했다. 세 회사 모두 1달러 주식 1주만을 발행한 회사로 모색 폰세카의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지점이 있는 빌딩에 주소를 두고 있는 등 전형적인 페이퍼컴퍼니 구조를 띠고 있다. 뉴스타파 취재 결과 해당 빌딩엔 노재헌씨의 회사 말고도 수천 군데의 페이퍼컴퍼니가 주소를 둔 것으로 확인됐다.

취재에 따르면 노재헌 씨는 2013년 5월24일 세 회사의 이사직을 사퇴하는데 One Asia International과 GCI Asia의 경우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첸 카이(Chen Kai)씨가, Luxes International은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김정환씨가 이사직을 물려받았지만, 뉴스타파는 이 둘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자금 이동 규모와 비자금 연관성 여부에 대해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는 “아쉽게도 현재까지는 자금 이동 흔적이 나오지 않지만, 자본금 1달러짜리 조세도피처를 세운 목적은 명확하다. 해외비밀계좌를 만들어 조세·금융당국 감시를 벗어나려는 목적”이라면서 “(노재헌씨의 경우) 잘 알다시피 아버지(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을 아들 쪽에 은닉한다는 의혹이 있었고 부인과의 이혼 과정에서 재산이 공개될 우려에 처한 시기가 있었는데, 모종의 필요성이 있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뉴스타파는 회사의 설립 시기, 이사직 사퇴 시기 등을 고려하면 비자금 은닉 용도라는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고 있다. 취재에 참여한 심인보 뉴스타파 기자에 따르면 페이퍼컴퍼니 3개가 동시에 설립된 2012년 5월18일은 노 전 대통령이 사면 뒤 추징금을 내다가 230억을 남겨두고 추징금 납부 중단한 상황에서 동생 노재우씨와 사돈 신명수씨에게 남은 추징금을 내라고 주장하며 법적 다툼이 벌어졌던 때다. 또한 아들 노재헌씨가 부인 신정화씨와 홍콩법원에 이혼소송 제기하며 재산분할 청구소송에 같이 들어가 홍콩 법원이 재산공개 명령을 내린 때다. 심 기자는 “이 사실은 2011년 12월에 언론을 통해 알려져 노 전 대통령 비자금이 밝혀지는지에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라며 “그때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밝혀지지 않은 아버지 비자금을 은닉 위해 만들었을 개연성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SK 그룹과의 연관성 의혹도 지적됐다. 노재헌씨가 설립했고 최근까지 주요 주주이자 등기이사였던 회사 인크로스의 경우 매출 대부분이 SK 계열사와의 거래에서 발생했고 자사보다 규모가 큰 SK 계열사 ‘이노에이스’를 헐값에 합병한 데 따라 언론은 최태원 SK 회장이 ‘처남을 앞세워 위장회사(인크로스)를 설립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심인보 기자는 뉴스타파 보도를 통해 “(인크로스) 감사보고서를 보면, 2010년 홍콩에 ‘인크로스 인터내셔널’이라는 자회사를 설립한 흔적이 나온다. 자회사 대표는 노재헌씨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심 기자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홍콩은 노재헌씨에게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준 중개회사가 있고 (노씨가) 인크로스 인터내셔널 법인 대표로 재직하던 시절과 (버진 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시기가 일치한다”면서 “조세도피처 회사가 인크로스와 관련된 회사라면 최태원 회장과 관련있을 수 있다고 추정하지만 아직 확인된 사실은 아니”라고 밝혔다.

뉴스타파는 2차 명단 발표는 이주 중으로 두 차례 이뤄질 것이라 밝혔다. 김용진 대표는 “현재 확보된 명단 195명 중 두 자릿 수 정도는 신원 확인이 됐다”면서 “일부는 해외사업을 위해서 합법적으로 설립하고 당국에 신고했다고 소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소명이 적합한지 자료를 직접 확인해야 되는데 그런 자료를 안 보내줘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확인 과정을 거친 다음 발표할 것”이라 말했다.

지난 2013년 ‘조세피난처의 한국인들’ 보도를 통해 한국인의 역외 탈세 실태를 폭로하고 전두환 일가에 대한 검찰 수사와 추징금 납부를 이끌어낸 바 있는 뉴스타파는 이번 ‘조세피난처의 한국인들 2016’의 경우는 개인에 대한 폭로성보다 역외 탈세의 구조적 실태를 집중적으로 조명할 예정이라 밝혔다. 김용진 대표는 “2013년 보도 이후 해외 금융거래나 법인 설립 규제 필요성이 제기되니 국회, 정부가 관련 입법을 하겠다고 했지만 흐지부지됐다”면서 “당국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여전히 역외 자금 이동, 유령회사 설립이 이뤄지고 있고 점점 수법도 교묘해진다. 폭로성보다 구조적인 실천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문제제기할 것”이라 지적했다.

ICIJ는 4일 오전 3시부터 5일 동안 파나마 페이퍼스 취재 결과를 특별 홈페이지(panamapapers.icij.org)에 게재할 예정이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파나마 페이퍼스 공동취재팀은 대통령·총리 등 각국 정상 12명, 그들의 친인척 61명, 고위 정치인 및 관료 128명, 세계적인 초고액자산가 29명 등이 역외 탈세, 돈세탁, 검은 돈 은닉에 연루된 사실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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