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스턴글로브’의 탐사보도팀 스포트라이트의 기자 사샤(레이첼 맥아담스)는 보도 이후 변했다. 이전에 사샤는 주말에 할머니와 함께 성당에 나가곤 했다. 하지만 상습적으로 아동을 성추행하는 수많은 신부, 신부들의 악행을 알고도 오랫동안 눈 감아온 교황청을 취재하면서 더는 성당에 나갈 수 없게 된다. 뉴스를 접하기 전과 후 인생이 바뀐 것이다.

살면서 이런 뉴스를 접하게 될 기회는 얼마나 될까. 카프카가 말한 ‘도끼’ 같은 뉴스 말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문학에 대해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처럼 충격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 속 사건의 당사자들에게 그 사건은 모두 도끼였을 것이다. 스포트라이트 팀이 보도한 사건의 당사자들도 그랬다. 아동 시절 성추행을 당한 남자는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았지만 그때의 사건을 묻는 기자 앞에서 긴 시간 흐느낀다. 

▲ 영화 '스포트라이트'.
영화 속 이야기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주 작은 사건, 화재‧교통사고에서부터 시작해 뉴스에 나오는 수많은 사건은 당사자의 인생을 바꿔놨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들과는 달리 이런 사건을 접한 독자 혹은 기자에게 뉴스란 대부분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한다. 독자에게는 이것이 ‘남의 일’일 뿐이고 기자에게는 ‘일’ 일뿐이기 때문이다.

스포트라이트 팀이 이 사건을 맡기 전 ‘보스턴글로브’가 해당 사건을 다룬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스포트라이트 팀의 팀장을 포함해 보스턴글로브 기자들은 이미 이 사건을 알고 있었다. 아동을 성추행한 신부들의 리스트 역시 이미 몇 년 전에 제보를 통해 보스턴글로브의 손안에 있던 자료였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저 매일 쏟아지는 귀찮은 제보 중 하나로 취급했다. 귀찮은 제보가, 혹은 늘 알고 있던 대단치 않은 사실을 도끼같은 뉴스로 만들기 위해 스포트라이트팀은 보통의 언론이 원치 않는 방법을 택했다.

▲ 영화 '스포트라이트'.
우선은 비효율성이다. 스포트라이트 팀은 비효율적인 팀으로 취급받았다. 영화의 시작 부분 LA 타임스 출신 신임 국장 마티 배런(리브 슈라이버)이 보스턴글로브로 오면서 스포트라이트 팀에 묻는다. “한 사건을 두세 달에 걸쳐서 취재한다고요?” 스포트라이트 팀장은 어물어물 대답한다.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고요.” 매일매일 기사를 내서 많은 트래픽을 얻을 수 있는 가시적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또 하나는 배신이다. 보스턴글로브의 구독자 53%는 가톨릭 신자였다. 신임 편집국장 마티 배런이 사장에게 회사에 득이 되지 않는 보도를 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듯 고하는 장면이 들어간 이유다. 이후에도 가톨릭 지역을 독자로 상정한 보스턴글로브는 수많은 지역 유지들에게 취재를 그만하라는 직‧간접적 경고를 받게 된다. 스포트라이트가 보도하려는 기사는 권력에 대한 대항인 동시에 자신의 ‘돈줄’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 영화 '스포트라이트'. 사진=네이버 영화
이제 질문은 “왜 언론이 비효율적이며 독자와 돈줄까지 배신하면서 도끼 같은 뉴스를 보도해야 하느냐?”다. 스포트라이트의 기자 마이크 레젠데스(마크 러팔로)는 그 이유를 “누구든 당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뉴스를 읽는 독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될 때 사건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뉴스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임을 알려줘야 한다는 말이다.

‘스포트라이트’는 대단한 언론의 정의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팀장인 월터 로빈슨(마이클 키튼)의 입을 빌려 ‘시스템이 중요하다’고 반복한다. 이는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이상 끔찍한 사건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성추행을 당하는 이유는 운이 없는 한 신부를 만나서가 아니라, 성추행을 당해도 눈감아주는 시스템 아래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 안에서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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