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 누나, 얼마나 억울하셨나요. 우리 아버지는 눈을 못 감으시더라고요. 눈꺼풀이 안 감겨서 간호사가 연고로 붙였어요.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죽인 사람이 누군지 밝히고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지난 2012년, 삼성 반도체 공장 협력업체 직원인 아버지를 급성백혈병으로 떠나 보낸 손성배씨는 4일 고 황유미씨에게 추모 편지를 썼다. 손씨는 “남은 가족들 할 일은 간단해요. 다시 만날 때까지 같이 보낸 시간들 잘 되새기며 왜 아팠는지, 왜 헤어져야만 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라며 “우리가 지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당부했다.

▲ 삼성반도체 공장 직업병 피해자 고 황유미씨 9주기 추모문화제가 4일 저녁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열렸다. 사진=손가영 기자

삼성반도체 공장 직업병 문제를 세상에 처음 알린 고 황유미씨의 9주기 추모문화제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말고" 가 4일 저녁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열렸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진정한 사과’와 ‘배제없는 보상’을 요구하며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을 한 지 150일이 지나는 가운데, 반올림은 황씨를 추모하며 3월을 ‘삼성전자 산재노동자사망 추모의 달’로 선언했다.

문화제엔 피해 유가족을 비롯해 세월호 참사 유가족, 이날 오후 추모기도회를 열었던 스님, 연대하는 시민들 180여 명이 모여 삼성전자 본관 앞을 메웠다.

‘거리의 시인’이라 불리는 송경동 시인은 2008년 황씨의 1주기를 추모하며 지은 시 ‘누가 황유미를 죽였나요’를 낭독하며 문화제 시작을 알렸다. “우리 사회를 천천히 죽여가는 저 삼성의 악질 자본 일가라고 얘기하기엔 너무 사실적이어서 안돼, 근로복지공단과 노동부와 산업안전공단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얘기하는 것도 심드렁해, 나는 누가 스물셋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을 죽였다고 저 하늘 저 땅에게 고해야 할까” 송씨는 시 구절을 모두 읊으며 “영면하소서”라는 추모로 낭독을 끝냈다.

▲ 문화제가 열린 삼성전자 본관 앞 한 켠에 마련된 추모공간. 고 황유미씨의 영정 사진이 중앙에 위치해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길가는 밴드’로 음악활동을 하는 장현호씨는 노래로 추모를 대신했다. 장씨의 첫 곡은 ‘또 하나의 약속’이었다. 또 하나의 약속은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직업병 인정을 요구하며 삼성전자와 싸워 온 삶을 담은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장씨는 “황유미씨가 택시 뒷좌석에서 돌아가실 때, 눈 감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장면을 보고 지은 노래”라고 밝혔다.

유성규 노동건강연대 노무사는 연대발언에서 ‘메틸알코올 급성중독’으로 실명위기에 처한 삼성전자 하청업체의 산재 피해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 노무사는 “정부는 하청업체만을 엄단 처벌하겠다 하는데 진짜 공범은 영세업체들로부터 부품을 받아 최대 이익을 거둬들이는 대기업들”이라면서 “간단한 가이드라도 해줬다면 아마 이 젊은 노동자들은 이 좋은 세상을 자기 두 눈으로 바라보면서 건강히 살고 있을 것이다. 삼성과 정부는 공범으로서 문제 해결에 적극적 의지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 세월호 유가족 합창단 '416 합창단'이 4일 추모문화제에 참석해 추모곡을 합창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합창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문화제 참가자 사이에서 수차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날 세월호 유가족 17명은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가 적힌 노란색 외투를 입고 세월호 희생자 추모곡인 ‘잊지 않을게’와 ‘손을 잡아야 해’를 불렀다. 고 박시찬 군의 아버지 박요셉씨는 “함께 손을 잡아 달라”면서 “여기 계신 분들이 분노하고 같이 발을 쿵쿵 구르고 있다. 이 쿵쿵거림이 심장을 울리고 이 나라를 울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가족들이 고 황유미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읊을 때 장내는 더 숙연해졌다. 손성배씨의 편지 낭독 후 고인의 아버지 황상기씨와 어머니 박상옥씨가 참가자 앞에 나서서 황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박씨는 고인의 유해가 뿌려진 울산바위를 언급할 때 목이 메어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박씨는 “저들을 큰 소리로 욕 한 번 못한 내가 미워지고 원망스러웠다”면서 “엄마는 아빠, 동생 좀 더 보살피다 나중에 갈게. 엄마 얼굴 잊지 말고, 다음에 만날 때까지 잘 있어”라고 편지를 끝맺었다.

▲ 고 황유미씨의 어머니 박상옥씨와 방진복을 입은 권영은 반올림 활동가가 추모 행렬을 이끌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추모에 함께 한 시민들은 문화제가 끝난 후 흰 국화꽃과 ‘삼성을 바꾸자’가 적힌 피켓을 들고 삼성전자 본관을 한 바퀴 돌며 추모 행진을 했다. 이들이 행진하는 15분 동안 공유정옥 반올림 활동가는 삼성 반도체·LCD 공장 직업병 사망자 76명의 이름과 병명을 일일이 읊었다.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행렬에 따르는 사람들은 “기억하라” “살려내라”를 외쳤다. 이들은 삼성전자 본관 앞에 마련된 고 황유미씨의 영정사진에 국화꽃을 헌화하며 문화제를 마쳤다.

반올림은 이날 오전 11시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올해 3월을 ‘삼성전자 산재노동자사망 추모의 달’로 선포한다고 밝힌 바 있다. 반올림은 한 달 동안 삼성전자 본관 앞에 ‘추모의 거리’를 조성하고 매주 토요일 저녁마다 삼성 반도체 공장 직업병을 다룬 영화를 상영할 예정이다. 총선을 겨냥한 직접 행동, 삼성전자 규탄집회 등도 계획돼 있다.

반올림은 삼성전자가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사과와 보상 협의에 나설 때까지 노숙농성을 계속 해나갈 예정이다. 오는 5일, 농성은 151일째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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