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근데 내가 어떻게 다시 그 사람을 용서하냐고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피아노 학원 강사 이신애 역을 맡은 전도연은 아들의 유괴살인범 면회를 갔다가 그에 대한 용서의 마음이 증오로 바뀐다. 피해자가 사과를 받기도 전에 가해자 스스로 “신에게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는 말에 참을 수 없는 배신과 분노를 느낀 것이다. 

결국 용서는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도, 강요에 의한 것일 수도 없다. 설령 가해자에게 받은 상처를 평행 가슴에 묻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용서는 온전히 아픔을 가진 자의 몫이다. 가해자가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고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사과는 용서의 전제 조건일 뿐이지 당연한 귀결일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 학부교양 과목으로 ‘한국근현대사’ 수업을 들으면서 ‘수요집회’라는 것도 처음 참가했다. 시골 동네에서 늘 봐 오던 이웃 할머니들의 모습과 하등의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분들이 믿을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너무도 놀랐다. 

나눔의 집에 사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어느 경로당 어르신들보다도 평온해 보였다. 온몸 이곳저곳이 저리고 쑤시다고 해서 주물러 드리면 더없이 고마워하시던 할머니들이 가장 원했던 건 뭘까 생각해보니, 역시 가족이 그리운 분들에게 대신 가족이 돼 드리는 일이었다. 여생을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억대의 보상금이 바라지도, 으리으리한 좋은 시설에서 살기를 원하지도 않아 보였다. 단지 마음에 응어리진 한을 풀고 죽기 전에 일본군에게 당했던 수모와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명예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가족 같은 이들에게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 보였다. 

영화 ‘귀향’ 스틸컷 ⓒJO entertainment
그런 할머니들이 역정을 내는 모습을 봤다. 지난해 말 박근혜 정부 외교부 차관이 일본 정부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합의’했다며 할머니들을 방문했을 때였다. 양국 정부는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더 이상 재론하지 않도록 ‘해결’됐다고 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아베 내각 총리를 대신해 “마음으로부터 깊은 사죄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10억 엔(약 100억 원)을 지원한다고도 했다. 

왜 할머니들이 역정을 내셨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용서한 적이 없는데 누구 마음대로 용서하느냐’는 거였다. 정부는 일본과 위안부 협상 과정에서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았다. 정작 사과해야 할 일본 내각 총리는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정부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합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할머니들도 그만 용서하시고 노여움을 풀라고 한다. 누구 맘대로.

조정래 감독의 영화 ‘귀향’은 먼 타국에서 돌아오지 못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혼이 나비가 되어 돌아오기를 기림으로써 치유와 화해를 시도한다. “내가 그 미친년이다”며 울분을 토해내던 영옥 할머니가 함께 위안소로 떠났지만 돌아올 때는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동무를 다시 만나 가슴에 응어리졌던 한을 풀어낸다. 

아무도 영옥 할머니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않았다. 일본군과 조국에 대한 원망이 왜 없을까. 다만 함께 손잡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미안함이 할머니를 평생 고통스럽게 했다. 과거는 개인의 기억이다. 할머니 개개인이 가진 상처의 기억은 저마다 다르고 그것에 대한 치유와 용서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를 깡그리 무시한 채 금전적 보상과 조건부 사과를 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과거가 용서될 수 있을까.

영화 ‘마지막 위안부’ 포스터
지난해 개봉한 임선 감독의 ‘마지막 위안부’와 ‘귀향’은 일본군 위안소라는 민감한 역사적 배경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소 자극적이고 극적으로 연출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과 ‘공분’을 자아내게 했다. 실제로 모두가 그런 강제적 동원에 의해 위안부가 됐는지, 위안소의 풍경이 그토록 가학적이었는지, 해방 후 집단 학살이 횡행했는지에 대한 ‘논란’으로 비화되기도 좋은 소재와 접근이었다.    

그러나 감독이 위안부 역사를 다룸으로써 추구했던 것이 무엇이든 영화와 역사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듯, 이 영화를 본 관객들 역시도 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강박에 갇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민’보다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양국 정부의 위선적인 모습에 분노할 수는 있지만, 화해와 용서는 누구든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할머니들의 울분을 헤아리고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저마다의 기억을 용서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줬으면, 성급한 해결을 위해 복잡한 구조를 해부하고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 휘말려 들기보다 피해자들의 역사적 기억을 존중하고 그들이 계속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그렇게라도 한을 토해낼 수 있도록 보듬어 줬으면 한다. 

그리고 국가와 그릇된 권력이 일방의 관점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해결 짓지 않도록,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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