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만 시간을 더 달라. 이유를 설명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발언시간 3분을 받은 황상기씨가 발언을 제지당하며 한 말이다.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지난 16일 아시아아메리칸 언론인협회(AAJA) 서울지부가 주최한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 토론회’에 참석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 삼성 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 등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 해결의 세 주체가 모두가 참석한 이례적인 자리였다. 이날 황씨는 발언시간 때문에 수차례 말을 중단해야했다. 3분, 1분30초, 30초 등의 파편화된 시간은 황씨에게 매우 부족해 보였다.

토론회는 ‘TV토론’ 방식으로 진행됐다. 토론의 쟁점은 세 가지였고 세 주체 모두 토론회 전에 고지를 받았다. 쟁점에 대한 입장 발언시간은 3분씩, 반론은 30~90초씩 각 주체에게 부여됐다. 반론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졌고 답변하는 순서도 공정했다. 첫 질문엔 반올림이, 그다음 질문엔 가대위가, 또 그다음 질문엔 삼성이 먼저 답변을 했다.

▲ 아시아아메리칸 언론인협회(AAJA) 서울지부가 지난 16일 서울 인사동 뉴스백커 사무실에서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 토론회’를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일견 공정하게 보이는 룰 뒤편엔 꼼수가 있었다. 이날 토론회는 AAJA 서울지부가 삼성전자와 한 달여 간 조율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애초 토론회는 1월16일로 예정돼있었으나 삼성 측의 재고로 한 달 뒤로 미뤄졌다. 그러는 동안 삼성은 참석자 명단을 요구했고 토론회 형식과 질문을 AAJA 서울지부에 제안했다. 참석 가능한 국내 언론도 5개로 제한됐다. 이태훈 AAJA 서울지부장은 “토론회를 열기 위해 하나하나씩 제기되는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며 “피해자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엄밀한 발언시간과 순서가 주어지는 TV토론 방식은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에 알맞다. 그러나 이 방식은 전달능력이 뛰어난 전문가층에 적절한 방식이다. AAJA가 애초 구상한 방식도 다과와 함께 보다 자유롭게 토론하는 ‘티토크(Tea Talk)’였다. AAJA 행사의 일반적인 토론방식이기도 하지만 피해자들이 보다 편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 반올림 활동가들은 가대위측의 반대로 발언권을 얻지 못해 패널로 참여할 수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약자의 경우 자신의 입장을 얘기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법과 제도가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전문적이고 조직력있는 거대 기업과 싸워 온 과정을 설명하려면 상황을 자세히 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는 9여 년을 끌어온 싸움이기도 하다. 피해노동자 한혜경씨의 어머니 김시녀씨는 토론 과정에서 “진실규명하고자 하는 이야기니까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질문 구성도 삼성에 ‘유리’했다. 질문을 미리 알려달라는 삼성의 요청에 이 지부장은 지난 1월26일 질문지를 보냈다. ‘백혈병 사망률이 일반인보다 높다는 주장에 대한 입장이 무엇이냐’ ‘반도체 노동자의 안전한 작업환경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 ‘보상을 받은 피해자가 합의서의 사본을 가질 수도 없다는 주장에 대한 답변’ 등 삼성에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이 다수였다. 이에 삼성은 △피해자가 200명이 넘는다는 반올림 주장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 △어떤 보상과 사과가 적정한지에 대한 논의 △미래와 관련해 사회적 의제로서의 갈등 해결방식에 대한 논의 등 3가지 쟁점을 제시했다. 이 안이 토론회의 골자가 됐다.

이 지부장은 삼성의 참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질문에 대해 “삼성 측에 유리한 팩트 확인”이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기자들이 원하는 팩트확인은 어떤 강압이 있었고 그에 대한 증거가 있는지, (피해자들의 산재신청 등에) 절차상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보상 확인서에 대한 사진이나 사본을 못 갖게 하는지 등에 대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언론사에 대한 통제시도가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삼성은 “누가 나오는지 알아야 거기에 대해 준비를 하고 여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참여자 명단을 요구했고 한겨레, 경향신문, 미디어오늘 등 국내 언론사와 AP통신 등 비판적 기사를 작성했던 일부 외신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했다. 이 지부장은 “우리가 이런 행사를 한두 번 하는 게 아닌데 명단을 요구한 경우는 없었다”면서 “한국 언론에 참석 쿼터를 둔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AAJA 서울지부는 한국 언론에 5개 쿼터를 뒀고 경향신문, 한겨레, 미디어오늘, 코리아헤럴드, 코리아타임즈가 이날 행사에 참여했다.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지난 2013년 3월 서울 곳곳에서 전자산업 피해자 추모주간 행사를 열었다. 사진=반올림 제공

이 행사는 평소 정보 접근에 한계가 있는 외신기자들이 충분한 정보를 알기 위해 준비한 자리였다. 이들은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의 심각성에 공감을 하던 중 외신기자도 이 사안을 다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세 주체의 충분한 입장을 듣기 위해 토론회에 참석했다. 행사는 일견 공정해 보였지만,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증언들은 충분히 나오지 못했다. 이 지부장 또한 “패널 구성으로 보나 형식으로 보나 반올림에 특히 불리한 구조였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는 직업병 문제의 원인 제공자이자 사회적 책임을 가진 대기업으로서 문제 해결을 위한 공론화 과정에 성실한 자세로 임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지난 한 달 동안 물밑에서 보인 작업은 그 의무를 방기하는 자세로 보인다. 이 행사가 총 참석인원이 20여 명인 소규모 토론회였던 점을 고려하면 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비판을 피하는 방법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지 비판의 목소리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삼성은 자신의 반도체공장에서 벌어진 죽음에 대한 사회적 논의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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