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포털 사이트에서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김종인'을 치면 '김종인 궤멸'이 자동 완성어로 뜬다.

지난 9일 설 연휴 기간 경기도 파주의 군부대를 방문한 김종인 대표는 "장병들이 국방 태세를 튼튼히 유지하고 우리 경제가 더 도약적으로 발전하면 언젠가 북한 체제가 궤멸하고 통일의 날이 올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면서 논란이 됐다.

김 대표의 발언은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연설을 통해 대북 강경책 전환을 밝히고 사실상 북한 붕괴론에 가까운 발언을 내놓으면서 다시금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제재 일변도의 대북 정책의 일환으로 개성공단이 폐쇄되는 등 남북관계가 단절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북한 붕괴론과 맞닿아 해석될 수 있는 김 대표의 발언이 더불어민주당의 정체성 비판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문재인 전 대표는 개성공단 폐쇄 결정에 대해 박근혜 정부를 맹비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김종인 대표의 발언이 부각되고 있다.

이에 더해 국민의당이 홍용표 통일부 장관의 해임을 촉구하면서 박근혜 정부와 각을 세우고 더불어민주당보다 선명한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김 대표의 발언이 부적절했다는 내부 비판도 흘러나오고 있다.

김 대표의 발언은 핵무기 개발 등에 집중하면 북한 정권의 경제가 무너지고 체제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적을 대상으로 무너뜨린다는 뜻의 ‘괴멸’이 아닌 스스로 붕괴한다는 ‘궤멸’이란 의미라 문제가 없다는 것이 김 대표의 주장이다.

박 대통령 국회 연설에 앞서 대통령과 독대했던 김종인 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개성공단의 폐쇄 이유와 불가피성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달라"(김성수 대변인 브리핑)고 한 내용도 김 대표의 궤멸 발언과 연결돼 부적절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김 대표는 15일 jtbc 인터뷰를 통해 "궤멸은 국어사전에도 흩어져서 없어진다는 뜻으로 돼 있는데 그 말에 자꾸 포커스를 맞춰서 이러니저리니 하는 것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솔직히 얘기해서 그 말 자체에 대해서는 취소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궤멸 발언은 김 대표의 과거 행적으로 볼 때 자신의 소신으로 보인다. 지난 2002년 한국일보에 기고한 칼럼을 보면 김 대표는 "독일 통일은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서독 정부의 정책이 동독 체제를 변화시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경제체제 와해라는 역사적인 순간이 갑자기 도래하여 이룩된 것"이라며 "만일 한반도에도 통일이 실현된다면 남북 정부간의 대화를 통한 체계적, 단계적 통일이라기보다는 상황 변화에 따라 어느 날 예고 없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과연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 능력이 앞으로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막대한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며 "한국경제의 체질 강화와 보다 많은 부의 축적이 국가 경영의 최우선 과제이어야 할 것"이라고 썼다. 김 대표의 주장은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로 인한 경제적 붕괴가 올 수 있고 부지불식간 통일의 상황이 도래할 수 있으니 한국도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압박책을 통한 붕괴보다는 북 체제의 경제가 파탄날 것이라고 예단하면서 '궤멸'이라는 표현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14년 2월 '통일 헌법, 대한민국의 미래'라는 토론회에서 기조연설을 맡은 김 대표가 "우리가 통일을 맞이하려면 북쪽에 있는 2300만 주민을 먹여 살릴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럴 의사가 있어야 한다”면서 “(통일 비용의) 지불 수단과 능력이 없으면 통일이 와도 그 기회를 포착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도 칼럼의 주장과 맥락이 닿아있는 내용이다.

김 대표는 지난 2011년 12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경직된 사고방식으로 북한을 대해서는 안된다. 전쟁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대화는 해야 한다는 것이 클라우제비츠의 말인데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이유로 대화하지 않겠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이라며 대화를 통해 북핵 해결에 주안점을 뒀다.

과거 입장과 비교하면 최근 김 대표의 궤멸 발언은 경제민주화를 주창해온 김 대표의 눈에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는 경제를 뒷받침할 수 없어 무너질 수 있고 이를 위해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등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에서 나온 내용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 대표의 발언은 궤멸이라는 단어가 주는 상징성, 북한 붕괴라는 전제 조건을 달고 있다는 점에서 흡수통일을 지향하는 게 아닌가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특히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더불어민주당의 대북 정책과 비교해 김 대표의 발언은 이질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사진=민중의소리

당 내부 비판의 핵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성공단 폐쇄 사태 속에서 제1야당이 대안을 내놓는 것도 모자라는 판에 '궤멸'이라는 표현을 써서 정부와 여당에 빌미를 주고 정체성을 의심받고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무소속 박지원 의원은 16일 KBS 라디오에 출연해 김 대표의 발언에 대해 "아무런 대안 없이 그렇게 막말을 하는 것은 굉장한 혼란만 불러온다"고 말했다. 박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해 정치적 위치가 다른 곳에 서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김 대표의 발언에 대해 '막말'이라고 비난한 것은 '배신감' 마저 느껴지는 대목이다.

개성공단 폐쇄, 한반도 사드 배치 문제 등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에 가려져 있지만 김 대표의 발언에 대한 당 내부 비판도 나오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총재시절 보좌관을 했던 설훈 의원은 17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김 대표가 단어 선택을 적절히 했어야 했다"면서 "박근혜 정권이 이런 상황까지 왔으면 야당이 중심을 잡고 장점을 살리면서 박 대통령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덩달아 같이 이렇게 말해버리면 야당의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설훈 의원은 또한 "북이 궤멸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햇볕정책은 남과 북이 같이 살자는 건데 궤멸 운운해버리면 안된다"면서 "북한이 나빠보여도 막말로 나쁜놈이라고 하면 대화가 안되는 것이다. (이런 식이면) 남북관계 대화는 요원하다. 현명한 방법(발언)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야권 관계자는 "60년 야당의 정통성을 흔들어놓은 발언으로도 볼 수 있다"면서 "김 대표는 야당과 맞지 않다. 더욱이 이런 중대한 발언에 대해 당 내부에서도 아무말도 못하고 조용히 지내는 것도 야당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잘못했으면 지적하는게 맞다. 486 운동권 출신 의원들도 비겁하게 공천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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