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가 사과, 보상 등 2대 쟁점에 대한 협상 재개를 요구하며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133일째 농성을 이어가는 가운데, 삼성전자는 3대 쟁점 협상이 타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대화 재개 가능성을 일축했다. 삼성직업병 문제해결을 위해 협상에 나섰던 세 주체 반올림, 삼성 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 삼성전자는 지난 16일 아시아아메리칸 언론인협회(AAJA) 서울지부가 주최한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 토론회’에 참석해 현안에 대한 입장차를 재확인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삼성전자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만 유독 문제가 불거진다는 지적에 ‘문화적 차이’를 언급해 반올림 및 피해자 가족 측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토론회는 △삼성 반도체·LCD 공장 직업병 피해자 규모 △3대 쟁점에 대한 입장 △직업병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향후 계획 등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삼성전자 측 대표로 백수하 상무와 김선범 부장이 참석했고 피해당사자 대표로 반올림의 황상기씨(고 황유미씨 아버지), 김시녀씨(피해자 한혜경씨 어머니) 및 가대위의 송창호씨, 김은경씨가 참석해 토론을 진행했다.

▲ 아시아아메리칸 언론인협회(AAJA) 서울지부가 16일 주최한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 토론회’에 반올림의 김시녀씨, 황상기씨, 가족대책위의 송창호씨, 김은경씨, 삼성전자 측 백수하 상무, 김선범 부장이 패널로 참석했다.(왼쪽부터) 사진=손가영 기자

지난 2007년부터 삼성전자 반도체 및 LCD 공장 직업병 피해자 제보를 받아 온 반올림은 지금까지 드러난 피해자가 223명에 달한다고 주장해왔다. 반올림 대표로 나선 황씨는 “삼성은 피해보상 신청한 사람이 150여 명 된다고 말하지만, 암에 걸린 사람만 해도 그보다 훨씬 많고 삼성의 회유·협박 등을 고려하면 223명보다 더 많을 것”이라며 “(명단이 있지만) 삼성 측에서 (피해자로 하여금) 반올림에 신고 못하게끔 막고 회유하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가대위와 삼성 측은 223명에 의구심을 표했다. 가대위의 송씨는 “제보를 받거나 주위 사람에게 들은 것을 모아서 200명으로 말하는 것 같다”며 “200명 명단이 진짜 존재한다면 우리들에게 주면 좋겠다. 그분들이 몰라서 (보상) 혜택을 못 받을 수 있으니 그분들 연락처를 다 주면 직접 의사를 물어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백 상무는 “이제까지 200명 넘는다고 말하지만, 구체적 명단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다”며 “반올림에서 2012년 7월 백혈병 피해자 증언대회 자료집에 140명을 명단에 올린 적 있는데 22명만이 실명으로 거론돼있다. 삼성전자 아닌 사람 35명이 포함됐고 다른 사업부의 관계없는 사람이 36%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황씨는 “반올림에 신고 들어 온 사람들은 모두 반도체.엘시디 공장에서 암에 걸려 억울하다고 신고한 것이지 거기 안 다니는데 반올림에 신고한 사람은 없다”며 “(직업병 피해에 대해) 삼성은 책임을 피하고 처벌을 안 받기 위해 여태까지 자기네와 아무런 관련없는 개인적 질병이라 해왔다”고 반박했다. 가대위와 삼성 측의 명단 공개 요구에 대해서도 “우리가 직접 회유를 당한 적이 있다. 삼성에서 그렇게 회유를 하거나 때론 협박을 한다”고 거부 이유를 밝혔다.

사과, 보상, 재발방지 등 3대 쟁점 타결 여부에 대한 입장차는 선명하게 드러났다.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는 지난해 7월 세 주체에 조정권고안을 제시했고 올해 1월12일 사과와 보상을 제외한 재발방지책에 한해 협상이 타결된 바 있다. 그동안 삼성전자는 조정권고안과 별개인 독자적 보상위원회를 구성해 보상을 추진했고 지난 1월14일 피해자 110여 명에 대한 보상이 완료됐고 개별 사과문을 전달해 “조정의 3대 쟁점은 모두 해결됐다”고 발표했다. 반올림은 이에 반발하며 ‘배제없는 보상’과 ‘삼성전자의 책임을 명시한 사과’를 요구했고 2대 쟁점에 대한 협상은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라고 입장을 밝혀 왔다.

▲ 아시아아메리칸 언론인협회(AAJA) 서울지부가 주최한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 토론회’에 월스트리트저널, AP통신 등의 외신 기자 및 프리랜서 외신기자와 일부 국내 매체가 참석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이날 백 상무는 “예방안에 대해서는 3자 합의를 통해 의견을 모았고 보상은 150명이 넘게 신청을 해 110명 정도가 보상을 수령했다. 지난 1월14일에 가족대책위원회가 회사를 찾아와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로부터 개별 사과문도 수령했다”며 3대 쟁점 협상이 타결됐다는 입장을 밝혔다.

가대위의 송씨는 “피해자 110명이 기준에 맞춰 합리적인 타협을 봤는데 (반올림) 기준에 안 맞다고 제대로 된 보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가대위도 가만히 있진 않겠다”며 “보상에 대해선 타결을 봤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김은경씨는 “반올림에게 앞으로 보상 문제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본 적 있는데 반올림은 구체적인 계획없이 무작정 싸우겠다고 했다”며 “싸우는 동안 피해당사자들은 죽어간다.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지혜롭게 풀 수 있는 게 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반올림의 황씨는 “삼성은 조정위 권고안을 지키지 않았고 삼성이 거부한 바람에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며 “김시녀씨와 나를 포함해 많은 피해자들은 보상, 사과 논의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보상과 사과 합의 타결은 안 됐다”고 말했다.

합의 타결에 대한 입장이 나뉘는 배경엔 보상 기준의 공정성과 사과의 진정성에 대한 갈등이 있다. 황씨는 삼성전자가 구성한 보상위원회에 대해 “객관적이고 무관한 사람이 보상안을 만들고 보상을 해주는 게 맞다. 가해자가 보상을 해주면 보상액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면서 “반올림에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제보하는 피해자가 많다. 실질적으로 피해자가 입은 치료비, 경비, 충분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하는데 협소한 보상이 이뤄지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백 상무는 “반올림 주장하는 배제없는 보상은 산재 신청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무조건 보상 대상이 돼야 한다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면서 “보상은 조정권고안에 대해 금액 카테고리 지정된다”고 밝혔다.

이어 백 상무는 사과와 관련해 “2014년 5월 대표이사가 공개사과문 발표했고, 개별적으로 보상이 이뤄지는 당사자에게 사과가 이루어졌다”면서 “보상이 종료된 시점에 직접 가대위와 대표이사가 만나 한 분 한 분께 사과문을 전달한 적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황씨는 “김시녀씨의 딸은 뇌종양 1급 장애를 얻어 혼자서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는다. 우리 유미가 죽은 후로는 엄마는 우울증에 걸려 힘들어하고 집 지으려 마련한 돈은 치료비와 경비로 다 써 거지가 됐다. 오막살이 집에서 살고 있다”며 “법원에서 독극물에 의해 (유미가) 죽었다고 인정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아무 내용없는 사과를 했다. 삼성이 이렇게 많은 피해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그 토대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날 삼성전자 대표단은 “세계적으로 반도체 기업이 많은데 왜 삼성이 굳이 이런 뉴스에 오른다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국의 문화적 배경’을 언급해 피해당사자 가족의 반발을 샀다. 백 상무는 “삼성이 대한민국에서 가지는 독특한 지위가 있다. 지난해 1월부터 9월 말까지 삼성전자 앞에서 열렸던 시위가 500여 건이나 된다. 도로공사의 경우 발주처가 지자체든 국방부든 시공업체가 삼성물산이기 때문에 삼성에 와서 한다”며 “이러한 문화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고 답했다.

이에 황씨는 “삼성이 그만큼 잘못한 것이 많이 있는데 해결을 안 하고 힘으로 누르는 것 자체를 돌아봐야지, 문화적 차이로 남의 탓으로 돌리는 건 안된다”고 반박했다.

▲ '삼성직업병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는 노숙농성' 77일차를 맞은 날, 방진복을 입은 221명의 참가자들은 삼성전자 강남사옥 일대를 돌며 직업병 재발방지대책과 배제없는 보상, 진정어린 사과를 촉구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백 상무는 토론 중 고 황유미씨가 쓴 메모를 제시하며 ‘유미가 화학물질에 대한 안전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황씨의 말을 반박했다. 백 상무는 “(여기엔) ‘설비 흐름 순서’, ‘final 린스’ 등이 적혀있고 업무 진행 과정과 그와 관련된 물질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있다”며 “황유미씨에게 과정이 어떠한지 교육이 된 것을 보여준다. 인식 호도를 자제해달라”고 주장했다. 해당 메모는 삼성반도체 공장 직업병 문제를 다룬 영화 ‘탐욕이 제국’의 캡쳐본이었다.

임자운 반올림 활동가는 토론이 끝난 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그 내용 중 ‘화학물질의 유해성’, ‘안전사고 시의 대처방법’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삼성이 제시한 부분도 ‘안전보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공정 기술’에 관한 것이었다”면서 “‘안전보건’에 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것은 직업병 피해자들의 공통된 진술이다. 그들 모두 ‘공정 기술’에 대한 교육은 숱하게 받았다고 했다. 반도체 칩을 더 빨리, 더 많이, 불량률을 줄여가며 생산해 내기 위해 알아야 했던 내용들이다. 삼성이 한참 잘못 짚은 것”이라 밝혔다.

이날 토론회는 재발방지책에 관한 세 주체의 협상이 타결된 시점인 지난 1월16일로 예정돼있었으나 삼성 측의 재고로 한 달 뒤로 연기됐다. 애초 토론 방식도 차를 마시며 편하게 토론하는 ‘티톡(Tea Talk)’이었으나 삼성 측의 요구로 발언시간과 순서가 명확히 정해진 방식으로 변경됐고 토론회에서 제기된 주제도 삼성이 제시한 안이 그대로 반영됐다. 토론회를 총괄한 이태훈 AAJA 서울지부장은 “이런 자리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고 오래 준비해왔는데 삼성이 또 보이콧해버리면 행사가 무산될 수 있어 삼성 측의 의견을 많이 반영해갈 수밖에 없었다”면서 “피해자와 가족 등 일반인에겐 불리한 조건이라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모임 자체에 희망을 가지고 준비했다”고 말했다.

AAJA 서울지부와 삼성 간의 의견 조율 과정에서 삼성은 매체 참석 명단을 요구하며 일부 매체에 대해 ‘편향된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오면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반올림 활동가는 가대위 측의 요청으로 토론회 패널로 참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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