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먼저, 합리화는 그다음

2월 7일 북한이 ‘광명성 4호’를 발사한 후 정부가 바쁘다. 그동안 미국과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던 ‘사드’를 곧장 도입하겠다고 하고, 개성공단 가동을 하루아침에 전면 중단시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을 내다보지도 않는 것 같다.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냥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묻거나 따지면 ‘종북’이라고 몰아부일 기세다. 2001년 국정원이 발의한 ‘테러방지법’까지 덩달아 꿈틀거린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40년 넘게 쌓아온 평화공존의 토대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흔들어댄다. ‘사드 배치’, ‘개성공단 가동 중단’, ‘테러방지법’이 남북관계, 국내 인권, 주변국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꼼꼼하게 분석하고 계산했다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갑작스럽다. 남북대화, 교류, 협력에 관한 정책을 수립할 책임이 있는 통일부는 대통령의 결단을 사후에 합리화하기 바쁘다.

국민은 봉사의 대상이 아니다

개성공단 가동이 전면 중단되면 직접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입주한 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10일 통일부 발표 3시간 전에 ‘통보’를 받았다고 알려졌다. 가동중단을 오래전부터 심사숙고했다면 철저하게 무시당했거나 따돌림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이해 당사자들과 협의할 시간도 없이 조급히 결정한 셈이 된다. 남북교류를 담당하는 통일부 공무원들도 10일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사실을 몰랐다는 보도가 있었으니 결정이 조급하게 내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결정 과정이 길었더라도 입주업체들과 협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세월호의 마무리,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과의 합의 과정에서도 이 정부는 당사자들과 진솔하고 충분하게 대화하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어려움을 안고 있는 사람들을 박근혜 정부는 대변하고 봉사하고 보호해줘야 할 책임이 있는 국민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빨리 치워버려야 하는 골치 아픈 문제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논의 과정에서 그렇게 매몰차게 외면할 수 없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피해

당연한 이야기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에 따라 선출된 선출직 공무원이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헌법 제4장 정부, 제1절 대통령 제66조 3항)’ 계엄을 선포할 수 있지만 지체 없이 국회에 통보해야 하고 국회가 요구하면 해제해야 한다. 사면, 감형, 복권을 명할 수 있지만, 법률에 따라야 한다.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통일부는 11일 개성공단 전면중단조치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공익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행정행위라고 밝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법적 근거를 묻자 내놓은 답이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은 우리나라 법령에는 없는 용어다. 다만 지난해 대법원이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1970년대) 발동을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고 불렀다. 2010년 천안함 관련 ‘5.24 조치’로 손해를 입은 개성공단 입주업체가 낸 소송에서도 법원은 ‘정부의 방북 불승인은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재량 행위’라며 국가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각종 지원을 하겠다는 정부의 말과는 달리 이번 가동중단으로 발생하는 손해는 업체들이 감당해야 할 개연성이 크다.

과녁이 어디인지

고도의 정치적 판단의 결과가 잘못되면 고도의 광범위한 피해가 온다. 입주업체들이 입는 직접적인 피해는 차라리 작은 문제다. 우선 지난 2013년 8월 14일 채택한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를 우리 정부가 파기했다. “남과 북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세의 영향을 받음 없이” 공단을 정상적으로 운영하자는 합의였다. 통일부 당국자는 ‘정세’에 대해 규정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고 한다. 궁색하다. ‘어떠한’은 따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 아닌가. 1972년 7.4 공동성명 이후 북한이 여러 합의문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던 우리 정부가 이제 그 반대 입장이 되었다. 앞으로 북한과 일절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지난해 다섯 달 만에 어렵게 다시 문을 연 개성공단 문을 닫는 데 너무 성급했다. 정말 개성공단 가동 중단이나 폐쇄가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중단하게 하는 위협수단이 된다고 생각했다면 그 패를 너무 일찍 보여줬다. 협상으로 보기에는 너무 미숙하다. 그래서 목표가 북한이 아니라는 의심이 일고 있다.

다시 먼 길 돌아가야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벌어진다. 2016년은 중요한 해다. 남과 북이 휴전을 한 지도 63년이 지났다. 그래도 시사 용어사전에 ‘북풍’이란 단어가 있는 현실이다. 전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공감대를 가꾸어 온 지 40년이 지났다. 때로 한 걸음 후퇴하기도 했지만 조금씩 전진했다. 그런데 이 정부 들어 많이 후퇴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고도로 정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화’, ‘공존’을 통해 ‘통일’로 가는 방법은 ‘대화’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는 대화가 아니라 가르치려 들었다. 실패했고 또 실수했다. 다시 먼 길 돌아가야 할 숙제만을 쌓아가고 있다.

(미디어오늘이 민주언론시민연합과 콘텐츠 제휴를 시작했습니다.
이 칼럼은 민언련이 발행하는 웹진 ‘e-시민과언론’과 공동으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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