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거라 생각했는데 순하신 것 같아요”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칭찬으로 하는 말이었다. “센 여자는 별로”라는 말이 뒤에 붙었으니까. 그냥 웃었다. 거기서 발끈하면 ‘센, 별로인 여자’가 되는 거였기에. 취재원들은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종종 그런 ‘칭찬’을 했다. 돌이켜보면 스스로도 ‘센 여자’라는 말을 듣는 것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김을동 새누리당 최고위원의 여성 비하 발언 논란을 보며 복합적인 감정이 든 이유다. 김 최고위원은 지난 3일 “여성이 너무 똑똑한 척을 하면 밉상을 산다”며 “약간 좀 모자란 듯한 표정을 지으면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은숙 변호사도 지난 4일 YTN 시사토크 프로그램 ‘시사탕탕’에서 “똑똑하고 야물딱져 보이는 여자가 어디가면 밥 한 그릇 얻어먹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이날 해당 프로그램에선 “굳이 틀린 말도 아니다” “확대해석 하는 것” 등의 발언도 나왔는데 김 최고위원 발언 논란에서 따져봐야 할 본질은 여기 있다. ‘굳이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것.’ 김 최고위원과 해당 프로그램 출연자들의 발언은 명백한 여성 비하이고 여성들에게 ‘약간 모자란 듯한 태도’를 주문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들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까.

▲ 지난 4일 채널A '직언직설'화면 갈무리

“여성은 열등하다, 왜? 뇌가 작아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똑똑한’ 여성에 대한 폄하와 혐오는 오랜 일이다. 똑똑한 여성은 남성들의 지위와 여기서 발생되는 특권에 도전하고 나아가 가부장제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뇌의 크기를 근거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연구가 유행했다. 하지만 이 경우 코끼리가 가장 똑똑한 생물체가 되기 때문에 실패했다.

뇌의 크기나 몸에서 뇌가 차지하는 비율 등으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자 20세기 초에는 ‘호르몬’이 등장했다.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 철저하게 분리 돼 있으며 이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1921년, 사람의 몸에는 두 호르몬이 섞여 있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이 가설 역시 실패했다.

이런 ‘과학적인’ 시도와 동시에 남성의 지위와 특권을 위협할만한 똑똑한 여성에 대한 폄하와 혐오도 꾸준히 병행됐다. 그래서 똑똑한 여성들에 대한 평가는 가부장제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수준으로 왜곡된다. 가령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에 직접 참가하고 싶었지만 사회의 성역할 고정관념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자 대신 간호 장교가 됐다. 날 때부터 ‘돌봄’에 최적화된 ‘백의 천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현명한 아내이자 어머니’로만 알려진 신사임당은 자신의 학식과 예술성이 여성이라는 장벽에 막혀 빛을 보지 못하는 현실에 매우 분개했고 그 ‘분풀이’로 임종 직전 남편에게 “내가 죽은 후 재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여전히 후자는 생략돼 전해진다. 신사임당이 알면 분개할 일이다.

▲ 간호사 국가고시. 사진=민중의소리

신사임당의 유언 “재혼하지 마”

아예 가부장제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똑똑한 여성에게는 ‘비극적’ 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나혜석이 대표적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자기 시대의 지배 규범에 삶을 일치시키기를 거부한 여성은 가족에게 버림받고 노숙자가 되거나 정신병원에서 죽는다는 신화, 나혜석 콤플렉스는 잘못은 사회가 아니라 똑똑한 여성에게 있다는 가부장제 사회의 협박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실제 나혜석과 동시대에 삶을 마감한 이중섭은 말년에 가족과 헤어져 정신분열로 자해를 거듭하다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지만 이중섭의 죽음은 나혜석처럼 ‘시대를 앞서간 자의 비참한 말로’가 아니라 ‘위대한 화가의 치열한 예술혼’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 정희진은 “나혜석의 삶은 죽음으로 환원되지만 이중섭의 죽음은 삶으로 환원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라는 조언도 나온다. 스타강사였던 김미경씨는 ‘시어머니를 파트너로 만들‘고 ’남편 살리는 정의로운 싸움에 목숨을 걸‘며 ’회사의 모든 남자를 네 편으로 만‘들어서 생존하라고 조언한다. 김 최고위원의 발언도 이 연장선 상에 있다.

조선일보도 지난 6일 칼럼에서 김 최고위원의 발언을 두고 “꼰대 아저씨들이 담배 피우며 수군댈 말들을 여성 국회의원이 그것도 총선에 도전하는 여성 후배들에게 했다니 눈살이 찌푸려진다”면서도 “강한 여자를 두려워하고 멀리하는 한국 사회에선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리더십 전문가의 조언을 인용했다. 그 첫째가 따뜻함이었다.

▲ 지난 6일 조선일보 칼럼

새로운 조언 “남자를 네 편으로 만들라”

하지만 이게 최선일까. 생물학적으로 특정 성을 가졌거나 생물학적으로 특정 인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좀 모자란 듯이 행동하라’고 권하고 실제 ‘모자란 듯이 행동해야 살기 편한’ 사회가 우리가 바라고 지향해야 할 사회인가. 김을동 최고위원과 신은숙 변호사, 김윤덕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자신의 아이에게 이런 사회를 물려주고 싶은지 묻고 싶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이런 식의 조언과 실천은 공고화된 성별 위계를 무너뜨리기는커녕 더 굳건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 최고위원의 발언을 두고 “판사 며느리 두고 한 이야기인가” “대통령을 두고 한 이야기인가” 라는 비아냥보다는 김 최고위원의 조언이 왜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유효할 수밖에 없고, 이를 타파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해야하지 않을까.

※ 참고문헌=<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교양인), <젠더와 사회>(한국여성연구소, 동녘), <행복한 페미니즘>(벨 훅스, 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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