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 원 지급해드립니다”

지난 1일 한 포털사이트 자유게시판에 ‘삼성반도체 산재근로자(일명 삼성백혈병) 보상후기’가 올라왔다. 삼성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직업병을 얻은 박수연(가명·35)씨의 언니 혜란(가명)씨가 쓴 글이었다. 삼성이 독자적으로 꾸린 보상위원회는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지난해 말까지만 보상 신청을 받는다 통보했고, 수연씨는 그에 맞춰 접수를 했다. 한 달여 후 삼성전자는 수연씨에게 “서류준비에 들인 비용 4만 원은 지급하겠다”고 통보했다. 수연씨에겐 아픈 몸으로 7년 넘게 고생해 온 세월이 단돈 4만 원으로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혜란씨는 억울한 마음에 글을 썼다. 누리꾼들은 수연씨의 직업병 이야기와 삼성전자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에 함께 분노했다. 혜란씨는 글 말미에 이 사실을 제발 알려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4일 혜란씨와 전화인터뷰를 갖고 현재 삼성전자가 강행하고 있는 보상 절차가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고 있다는 토로를 전해 들었다.

아버지도 산재, 딸도 산재, “살이 쪽 빠진 채 얼굴에 노란 형광빛이 돌았어”

군산의 한 상업고등학교를 다니던 수연씨는 졸업반이던 1999년 여름 삼성 기흥공장에 입사해 2년여 간 일 했다. 혜란씨는 “아버지도 현장에서 일하시다 사고를 당해 장애를 얻으셨고 어머니가 혼자 생계를 맡고 있었다. 집안이 어려웠다”며 “동생은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했고 내 대학 등록금에도 돈을 보태줬다. 정말 착한 아이였다”고 말했다.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지난 2013년 3월 서울 곳곳에서 전자산업 피해자 추모주간 행사를 열었다. 사진=반올림 제공

혜란씨는 한창 반도체공장에서 일을 하던 수연씨를 “살이 많이 빠진 채 얼굴엔 노란 형광빛이 돌고 습진과 아토피에 자주 걸렸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혜란씨는 동생이 공부만 하다가 일을 시작해서 그럴 것이라 여겼고 동생과 함께 공장에 입사한 학교 친구나 선배들도 다 비슷한 모습이었기에 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수연씨는 후에 “공정 중에 청소세척 시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세척액을 이용해 바닥을 닦았다”고 말했다. 세척액은 유해성분 200여 가지가 들어있는 유해화학물질이다.

수연씨는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음악 선생님이 수연씨에게 음악의 길을 추천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합창부를 할 엄두를 못냈다. 그렇게 반도체 공장에 들어간 수연씨는 2년 후 다시 음악을 찾아 실용음악과를 진학했다. 공장에서 모아 둔 돈이 학자금이 돼 주었다. 혜란씨는 “동생이 촉망받는 인재였다”고 했다. 한 교수가 수연씨에게 음악을 계속할 것을 권유하며 4년제 국립대학으로 편입할 것을 제안했고 수연씨는 합격했다. 당시 아버지의 간경화 증세가 심해져 집안이 다시 어려워졌지만, 수연씨의 재능을 눈여겨본 지역의 장학재단과 학교의 후원회가 경제적 지원을 도와 수연씨는 음악공부를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졸업을 무사히 마치고 음악가의 길을 가던 수연씨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수연씨는 기흥공장을 퇴사한 지 몇 년 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2009년엔 결국 일어나지도 못할 상태가 됐다. 수연씨는 그때 성대와 대동맥 사이의 종양인 ‘두경부 종양’ 판정을 받았다. 당시 의사는 “수술 시 살 수 있을 확률이 50%, 성대를 살릴 수 있을 확률은 25%가 안 되고, 메스만 잘못 대도 대동맥이 터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다행히 수술은 안전히 끝냈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수연씨는 수술 직후 호르너 증후군에 걸려 왼쪽 눈 뼈가 함몰되고 동공이 작아졌고 기력은 눈에 띄게 쇠했다. 혜란씨는 “동생은 조금만 일해도 피곤해서 몸져 누웠고 유행하는 질환은 무조건 다 걸리면서 계속 아팠다.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치료받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삼성은 내가 죽어야만 보상을 해주겠다는 건가”

수연씨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을 알게 된 계기는 삼성 반도체공장 직업병을 다룬 시사프로그램을 보고서였다. 그날 방송엔 사망한 한 직업병 피해자와 함께 일했던 수연씨를 찾는 문구가 떴다. 그럼에도 수연씨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혜란씨에 따르면 당시 수연씨는 “나에게 공부할 기회를 준 회사인데 차마 그럴 수 없다”며 “죽은 친구를 위해 사실을 얘기할 순 있지만 보상은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건 운명이라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캡쳐화면.

치료비는 녹록지 않았다. 혜란씨는 “기력도 면역도 너무 약해 동생은 건강보조제를 거의 달고 산다”면서 “1년에 한 번씩 MRI 추적검사도 받고 3~4번씩은 꼭 서울 병원으로 올라간다”고 말했다. 앞으로 건강이 얼마나 더 악화될 지도 예측하기 힘들었다. 현재 수연씨는 면역기능이 심각히 저하돼 루프스라는 자가면역계 희귀난치성 질환에 걸린게 아니냐는 의증을 받았고 지난달에 갑상선 종양도 의심받아 진단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지난해 12월이 보상신청 마감기간인 것을 알게 된 혜란씨가 수연씨에게 이 사실을 전달했고 수연씨는 마지막 주에 보상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난 1일 삼성전자는 수연씨에게 “근무로 인해 생긴 질병은 맞지만 악성종양이 아니기에 보상할 수 없다. 신청을 위해 준비한 서류비용으로 4만 원을 지급할 테니 계좌번호를 불러 달라”고 답했다.

‘규정대로’를 되풀이하는 삼성 측에 수연씨는 “결국 내가 죽어야만 뭔갈 해준다는 거냐.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냐”며 “그 돈 안 받겠다”고 대답했다.

“구멍가게만도 못한 태도, 삼성 핸드폰 깨부수고 싶은 심정”

혜란씨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은 ‘두경부 종양’이 삼성전자 보상위원회의 보상 대상 질병 ‘3군’에 포함돼 있음에도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점이다. 삼성전자는 질병을 1, 2, 3군으로 나누고 3군 질환에 대해서는 치료비를 지급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악성종양과 양성종양을 구분하지 않았음에도 삼성전자 측은 수연씨의 종양이 악성종양이 아니라는 이유로 보상을 거부한 것이다.

수연씨는 두경부 종양의 후유증으로 안면 마비 증세뿐만 아니라 심각한 수준의 기력 저하를 얻었고 면역이 결핍되는 희귀난치성 질환 의증도 가지고 있다. 혜란씨는 “동생의 몸은 공포 덩어리다. 지금이 끝이 아닐 수 있다는 게 문제”라면서 “동생이 ‘내 몸에 어떤 질병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데, 결혼을 해 애를 낳고 정상적인 애가 태어나지 않으면 그게 상대에게 얼마나 큰 죄를 짓는 거냐’고 자신감 없어 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동생은 이제 겨우 35살”이라고 말했다.

혜란씨는 특히 “직원이 온다고 우리가 때리겠나. 형식적인 거라도 직원이 와서 ‘미안하다’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다’는 말은 할 수 있다”면서 “삼성은 사과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직업병 피해자 고 윤슬기씨의 어머니에게 처음에는 보상을 못 해준다 하다가 총 4800만 원을 보상하겠다며 월 100만 원씩 48개월 지급하고 100만 원 중 세금명목으로 3만 원은 공제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혜란씨는 “내 새끼 죽은 목숨값을 연금 주듯이 준다는 건데 정말 예의가 없다. 어머니를 괴롭히는 것밖에 안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 '삼성직업병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는 노숙농성' 77일차를 맞은 2015년 12월22일 저녁, 방진복을 입은 221 명의 참가자들은 삼성전자 강남사옥 일대를 돌며 직업병 재발방지대책과 배제없는 보상, 진정어린 사과를 촉구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혜란씨는 “죽을 때까지 이거(직업병을 고발하는 글) 쓰려고 한다”고 전했다. 그는 “일류기업이 구멍가게만도 못한 해결방식이 너무 화가 나 삼성 핸드폰을 다 모아서 깨부숴 버리고 싶은 심정”이라면서 “오늘의 삼성을 만들어 준 이 사람들을 위해 기금 1000억 원 조성했다고 하는데 그걸로 대체 누가 보상을 받았나. 사주 주식이 몇백 억 오른다는 둥 말이 많은데 사주가 자기 걸 조금만 버려도 (보상은) 가능할 것”이라 말했다.

자의적 잣대·캄캄이 보상 절차… 반올림 “삼성, 자체적 보상 절차 철회해야”

이종란 반올림 노무사는 지난 4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수연씨의 경우, 삼성 기준에 악성과 양성을 구분 안 해놨음에도 배제한 것이고 조정 권고안에도 그런 말이 없었지만 협소하게 판단을 해서 보상 대상자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상담 사례를 보면 이래서 (보상이) 안되고, 또 저래서 안 되는 피해자는 더 많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 노무사는 “삼성은 피해자들에게 향후 치료비를 모두 보장해준다고 떠벌렸지만, 향후 치료비 보장이 전혀 안 되거나 기존 치료비의 일부만 지급하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난치성 질환과 관련해 이 노무사는 “다발성경화증, 루게릭, 루프스 등 희귀난치성 질환이 상당히 있고, 최근 역학조사 결과를 보면 유기용제에 노출이 많이 된 노동자들이 많이 걸린다는 연구발표가 있다”며 “이 병들은 계속 몸이 퇴행하고 고통 때문에 어디 가서 경제적 활동을 잘 하지 못해 평생 투병해야 하는 병이어서 피해자들 중에 기초생활수급권자도 많다. 유기용제 개연성이나 경제적 필요들 감안해서 보상대상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반올림은 삼성전자가 자체적인 보상절차를 강행한 때부터 그 절차의 폐쇄성과 자의성을 지적하며 규탄의 목소리를 내왔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9월 반올림,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 삼성전자 등 세 주체의 교섭을 중재하는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이 있음에도 ‘조정 보류’를 요청한 후 독자적인 보상위원회를 구성했다.

반올림은 지난달 13일 삼성의 독단적 행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이 보상신청 기한을 2015년 12월31일까지로 정해 당장의 치료비가 절실한 피해자들을 압박했다”면서 “보상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이 은폐돼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어 반올림은 “보상액 수준도 매우 낮으며 보상 대상 질병과 대상자를 축소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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