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 패권주의’,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19대 국회’, ‘쉬운 해고법 입법 거래하는 청와대’ 이런 식의 표현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당신도 ‘주요 방송사가 만든 ‘프레임’에 길들여진 것일 수 있습니다.

말은 생각을 담는 도구라고 합니다. 말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치의 선전 전문가 괴벨스의 선전술 중 대표적인 것이 ‘이름 붙이기(Name Calling)’입니다. 낙태에 대해 어떤 사회는 ‘가족계획’이라고 선전하고 어떤 사회에서는 ‘유아 살해’라고 말했습니다. 각 사회의 구성원들이 낙태에 대해 취한 입장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주요 방송매체의 보도 용어를 보면 나치의 선전술이 떠올라 섬뜩해집니다.

‘친노 패권주의’ vs ‘친박 패권주의’, ‘기업활력제고법’ vs ‘재벌 몰아주기법’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일했던 일부 정치인에 대해 ‘친노’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배타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의미의 ‘패권주의’를 붙여 ‘친노 패권주의’라고 부르는 건 대부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러나 ‘친박 패권주의’라는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에 가까운 사람들이 새누리당 내에서 배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친박’이나 ‘진박’이라고 이름붙여 일종의 프리미엄으로 부각합니다.

기업의 해고 권한을 강화하고 비정규직을 무더기로 만들면서 비정규직의 처우를 더 악화시킬 수 있는 법을 ‘노동개혁법’이라고 합니다. ‘노동개악법’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일부 재벌이 충분히 악용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는 법을 ‘기업활력제고법’이라고 합니다. ‘재벌 몰아주기법’이라고는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의미를 제거한 ‘원샷법’이란 별명으로 퉁칩니다.

여당의 갈등에 대해서는 성숙한 정치인의 견해차이라고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만 야당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박영선 의원은 누구의 품에 안길까?’, ‘김종인의 이종걸 달래기’, ‘인질‧볼모 정치’라고 표현합니다. 공직선거법 등 쟁점사안을 둘러싼 여야의 협상에 대해 ‘입법거래’라고 비하하면서 당선 전에 내세웠던 공약을 마구 어긴 대통령이 ‘국민을 인질로 잡고있다’고 주장한 것은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씁니다. 몸싸움과 다수당의 날치기 입법이 횡행하던 국회의 과거는 지워버리고 법에 따라 직권상정을 하지 않는 국회의장에 대해서는 ‘최악의 19대 국회’라는 말로 압박합니다. 방송만 보는 유권자는 20대 총선에서 여당과 야당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언론, 선거방송심의위 심의 결과에 대한 성찰 필요

선거방송심의에 관한 특별규정이 보도용어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정한 것은 ‘말’의 남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반증합니다. 특별규정 제5조(공정성), 제8조(객관성), 제12조(사실보도), 제16조(사실과 의견의 구별) 등이 모두 보도 용어와 표현에 대한 규정입니다. 여기에 더해 확인되지 않은 내용의 보도 금지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의견 등을 인용할 경우 출처를 명시하도록 규정(제17조)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악의적인 말장난이 일반적인 여론인 것처럼 무분별하게 확산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지난 27일 선거방송심의위원회는 “방송에서 친박, 신박, 진박 표현을 자제하라”고 방송사에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막강한 행정권력을 지닌 대통령과의 관계를 부각해 여당 우세 지역에 출마하려는 이들에게 공정하지 못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취지입니다. 위원회의 결정은 늦은감이 있지만 매우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거는 공약과 정책에 대한 철학, 후보에 대한 심층적인 평가에 따라 유권자들이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입니다. 방송은 마땅히 사실만을 공정하고 객관적인 용어로 전해야 합니다.

(미디어오늘이 민주언론시민연합과 콘텐츠 제휴를 시작했습니다.
이 칼럼은 민언련이 발행하는 웹진 ‘e-시민과언론’과 공동으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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