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직업 지위와 계층의 고착화 현상, 즉 흙수저론이 실증적으로도 사실임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발표했다. 물론 꽤나 단단히 굳어 있었다.

사회학은 사회이동(Social mobility)이라는 용어를 보면 알 수 있듯 인간 사회에 엄연한 층위가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계층을 넘나드는 이동성을 사회 건강의 중요한 가늠자로 쓴다.

그런데 계급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영 불편하니, 우리는 눈을 감곤 한다. 모두가 평등한 척, 노력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척하는 것이다. 본질을 덮는 일은 늘 부작용을 낳는다. 아이들이 힘들까봐 배려하는 척, 수차례의 교육 개혁을 했지만, 결국 만들어 놓은 것은 사교육이 효과적인 사회였다.

▲ @픽사베이
본질은 한국에서 대학교육이란 노동시장에서의 식별 신호, 즉 상징 자본을 구매하는 일, 일종의 금융상품과도 같은 일임을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 대학은 간판을 따러 가는 것이다. 이 간판은 직전 세대까지는 가장 효과적인 사회이동의 티켓이었기에 잘 팔린다. 이를 경험한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고, 수시와 입학사정권제도와 궁합이 잘 맞았다. 모두 고비용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잘 팔렸다.

전형적인 공급자 위주의 시장이다. 대학 캠퍼스는 매년 화려해지지만, 질적으로는 불만족스러운 고등교육이 완성된다. 얼마를 불러도 사는 사람이 있다. 명품이라며 수익성이 높다며 주장하면 먹히고, 가격은 마음껏 올라간다. 정부는 이 와중에 각종 국고보조금을 점점 더 내려보낸다.

문제가 생겼다. 이 상품의 수익률이 약속과 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등록금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인데, 졸업 후 사회이동은커녕 사회진출조차 여의치 않은 사태가 펼쳐졌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하지가 않다. 이는 또 다른 사태의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암 촘스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거액의 학자금 빚을 지게 된 학생은 사회를 바꾸는 일에 대해 생각을 하기 힘들다. 빚의 굴레에 빠지게 하면 그들은 생각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없게 된다. 등록금 인상은 일종의 훈육 기술인 것이고, 학생이 졸업할 무렵에 그들은 빚에 짓눌릴 뿐 아니라 규율 문화를 내면화하게 된다.”

어느 학교에나 루이뷔통의 백을 든 학생과 방과 후 당장 최저시급 알바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학생이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쪽도 도전할 동기와 용기가 없는 사태가 펼쳐진 것이다.

내우(內憂)다. 하지만 더 걱정해야 하는 것은 외환(外患)이다. 바로 정보화와 세계화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에서도 고착된 사회에 대한 정책적 함의는 이야기하고 있지만, 곧 밀어닥칠 이 변화, 남은 일자리를 뺏을 앱과 중국에 대해서는 직시하고 있지 않다. 부모세대만큼 부자가 되지 못하는 현재가 아니라, 모두의 일자리가 엉망진창이 될 미래가 걱정이다.

OECD는 사회가 통합되기 위해서는 원활한 사회이동과 동시에 사회적 포용과 사회적 자본이라는 3요소가 충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최근 유난히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가 붐이다. 벤처캐피털 Y컴비네이터도 기본소득에 대한 연구를 지원하기로 했다. 5개년 계획이다. 실리콘 밸리는 로봇과 앱이 직업을 앗아가는 근미래를 고려하고 있겠지만, 일하고 싶어도 모두가 일할 수는 없는 사회가 자동운전처럼 조용히 찾아오고 있다. 기본소득 구상은 ‘사회적 포용’의 일례다.

한편 ‘사회적 자본’이란 이 사회의 제도와 신뢰에 대한 것이다. 로비를 통해, 규제를 통해 한 자리 차지하면 뭐든 다 해먹을 수 있는 사회에는 없는 터전이다. 경제민주화는 이 문제이기도 하다. 세습은 그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레고도 에르메스도 따지면 세습 기업이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늘 레고 공장에서 레고만 생각해 온 아들의 경쟁력이란, 몇 대를 내려오는 일본 오뎅집의 노포(老鋪) 문화와 비슷한 것이다. 적법한 상속 절차를 거친 재산권에는 뭐라 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그 재산의 형성 과정을 사람들이 신뢰하고 제도가 공정한지에 있다. 유착에 의한 맥락 없는 문어발 경제가 문제다.

스타트업은 사회적 자본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스타트업은 사회에 공정한 게임의 룰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며, 또 공공의 자산 위에서 꽃이 핀다. 후배는 선배의 어깨 위를 밟고 올라간다. 법과 질서와 문화는 이를 존중한다. 오픈소스가 그랬고, 소프트웨어와 유전자에 특허를 인정 않는 풍토가 그랬고, 인터넷과 GPS처럼 정부는 기초에 투자 후 민간에 개방하는 문화가 그랬다. 이제 그 어깨 위에서 또 억만장자가 태어나 사회이동이 일어나고, 그들은 또 그 문화를 지켜나간다.

이제 우리는 무너진 사회이동뿐만 아니라 삼각형의 다른 두 변, 사회적 포용과 사회적 자본을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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