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반도체공장에서 일했던 난소암 직업병 피해노동자 최초로 산업재해 인정을 받았다.

서울행정법원(재판장 박연욱)은 지난 28일 고 이은주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에 대해 산업재해 인정 판결을 내렸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2013년 2월15일 고인의 질병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정해 유족이 청구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고 이은주씨는 1993년 고등학교 3학년이던 만 17세 때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 입사하여 6년 2개월 동안 온양사업장 2라인 금선연결 공정에서 일했다. 이씨는 1999년 6월 구토, 복부팽만 등 건강악화로 퇴사했고 2000년 5월 난소암(난소의 경계성종양) 진단을 받았다. 이씨는 오랜 암 투병 생활 끝에 지난 2012년 1월 3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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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은주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6년 여를 일하다 24세에 난소암 진단을 받고 12년간의 투병 끝에 36세에 생을 마감했다. 사진=반올림 제공

법원은 이씨의 질병과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되므로 이씨의 사망은 업무생 재해에 해당된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이씨가 금선연결 공장에서 일하며 유해 화학물질에 장기간 지속적으로 노출된 것으로 보이고 상당한 기간 주·야간 교대근무를 하였으며 그 기간 동안 피로, 스트레스가 누적된 것으로 보인다”며 “유해요인들이 복잡적으로 작용해 이씨에게 좌측 난소의 경계성 종양이 발병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난소암은 발병률이 낮고 발병요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점 △이른 나이에 이례적으로 난소암이 발병한 점 △가족력, 병력 등 개인적 위험인자가 없는 점 △발암물질 및 생식독성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점 △업무상 질병 불인정 근거인 ‘역학조사’에 문제가 있는 점 △주·야간 교대 근무가 질병을 촉발할 수 있는 점 등을 업무상 질병 인정 판단 근거로 제시했다.

법원은 이씨가 작업한 공정에서 발암물질 포름알데히드와 생식독성물질 페놀의 화합물이 포함된 에폭시수지 접착제가 사용됐고 고열이 필요한 공정과정상 이씨는 접착제의 열분해산물에 자주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얼룩제거용 세척제에도 생식독성물질이 포함돼있다”면서 “절단, 칩, 금선연결 공정이 동일한 환기시스템에 속해 있어 개별 공정 작업에서 사용된 화학용제가 작업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특히 법원은 “역학조사 당시 유해물질 농도에 대해 별다른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공기 중 유해인자에 대한 작업환경측정도 실시되지 않았다”며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 등에 비추어 보면, 근로자에게 책임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사정에 관해서는 증명책임에 있어 열악한 지위에 있는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인정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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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직업병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는 노숙농성' 77일차를 맞은 22일 저녁, 방진복을 입은 221 명의 참가자들은 삼성전자 강남사옥 일대를 돌며 직업병 재발방지대책과 배제없는 보상, 진정어린 사과를 촉구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법원은 역학조사의 부실함도 비판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근로복지공단의 의뢰를 받고 실시한 역학조사는 공정에서 사용된 화학물 ‘4-VCD’ 등이 난소에 독성이 있고 피부암을 유발하는 물질임을 인정하면서도 독성이 난소의 기능을 저하시킬 뿐이며 피부암과 난소암을 동일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난소암과의 관련성을 배제했다. 공정과정에서 일부 발암물질이 발생하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추가 조사 없이 유해물질과 난소암과의 관련성을 부정했다. 또한 석면, 탈크 등 난소암 원인물질이 해당 공정에서 사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기 중 유해인자에 대한 작업환경 측정 실시도 하지 않은 채 난소암과 관계있는 물질에 노출됐다 보기 어렵다고 결론내린 바 있다. 법원은 각각에 대해 모두 부적절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놓았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의 임자운 변호사는 “대법원은 질병의 업무관련성을 판단할 때 자연과학적·의학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으면 관련성이 인정된다고 판시한 바 있다”며 “근로복지공단의 가장 큰 문제는 대법원 판례를 무시하고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만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 비판했다.

임 변호사는 “판결 과정에서 삼성이 자료은폐와 거짓말로 유족들의 산재인정을 방해한 것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임 변호사에 따르면 삼성은 소송 과정에서 일부 화학물질이 누락된 자료를 제출했고 ‘세척제’ 사용 여부에 있어선 공단 측엔 사용을 했다고 밝혔음에도 법원에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

반올림은 난소암이 반도체 산업에서 산업재해로 최초 인정된 데 대해 “지난 9월 삼성전자가 기습적으로 강행한 보상 절차에 따르면 ‘난소암’은 3군 질환에 불과해 유족들은 가장 낮은 수준의 보상만 받을 수 있을 뿐”이라며 “삼성이 일방적으로 정한 보상 기준과 내용이 전면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반올림은 질병 종류, 업무내용, 근무시기 등에 따라 차등보상하지 않는 ‘배제없는 보상’과 모든 피해자들에게 치료비뿐 아니라 최소한의 생계비가 보장돼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해왔다.

반올림은 “17세에 노동을 시작해 24세에 난소암 진단을 받고 12년간의 투병 끝에 36세에 생을 마감한 고인과 유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위로가 되길 바란다”면서 “근로복지공단은 이번 판결을 겸허히 수용하고, 부당한 항소로 유족들의 고통을 연장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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