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올림 농성장’에서 김시녀씨가 천장을 향해 손을 뻗고 한 마디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이 안가려지는데, 왜 그러고 있지?”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를 만나 사과문을 전달한 데 대해 ‘보상과 사과까지 이루어져 삼성 백혈병 문제가 완전 해결됐다’고 적힌 기사를 읽은 후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탄식이 나오던 농성장엔 김씨의 말 덕분에 잠시 웃음이 퍼졌다. 권 부회장이 사과와 보상 문제를 끝냈다는 그림을 보여주는 동안, 삼성본관 앞엔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주장하는 반올림 농성장이 100일을 맞고 있었다.

지난 14일,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반올림)와 피해당사자들이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풍찬노숙을 시작한 지 100일째에 접어들었다. 오전부터 반올림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자유발언 ‘이어말하기’가 계속된 가운데, 저녁 7시엔 ‘방진복이 하얗게 빛나는 밤에’ 문화제가 100일 특집으로 진행됐다. 반올림 활동가들은 이날 문화제에 ‘새로운 1을 여는 우리의 온기’라는 부제를 달았다.

농성 100일째, 싸움 9년째, “반올림 덕분에 ‘직업병’ 알려져”

‘이어말하기’는 사람들의 발길 속도에 맞춰 진행됐다. 오후 3시, 방문자 5명이 잠시 중단된 이어말하기를 재개했다. 22번째로 바톤을 이어받은 김소유 행소인 활동가는 “IT기기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여러가지 부품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아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 노동인권문제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임용현 노동자계급추진위원회 조직국장은 “삼성이 시간을 두고 가족을 피 말리는 고통 속에서 몰고 있다. (돈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도록 협박하고 종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임용현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 조직국장이 14일 오후 삼성본관 앞에서 이어말하기를 하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농성장 주변은 5분 새 50~60명이 지나갈 정도로 유동인구가 많았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이들의 이어말하기에 몇 시민들은 굳은 표정을 짓고 지나갔다. 강남역을 향하던 이창환씨는 “삼성이 책임지는 게 당연한 건데 안되니 안타까운 것”이라며 “이 일이 잘되면 좋겠다”며 힘주어 말했다. 주변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강창환씨는 농성장 옆에 걸린 피해사망자 명단을 보며 “자가용타고 다니며 자주 본다. 젊은 사람들이 간 거라 정말 마음이 안좋다”며 “이런 일 다시 안 일어나게 (삼성이) 책임져야죠”라고 말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어말하기에선 반올림의 역사가 이야기됐다. 반올림에서 자원활동을 하며 많은 피해자들을 만난 정재현씨는 “삼성 반도체공장에서 일을 하며 집안 살림에 보태고 저녁엔 경찰공무원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병을 알게 되고 회사와 공부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기 직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일을 하며 즐거움 찾는 소소한 기쁨을 일을 하다 얻은 병 때문에, 그 꿈을 산산조각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슬프고 분노스럽다”고 말했다.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한노보연) 활동가는 “야간교대가 건강을 해칠 수 있는 것, 일터가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직업성 암이란 말이 신문에 실리게 된 것 모두 반올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면서 “퇴근하시는 여러분과 관계가 너무 많다. 집에 가서 반도체 직업병을 검색이라도 해달라”고 발언했다. 과거 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문성호씨는 “교섭위원들이 반도체가 둥근지 네모난지, 납작한지 뚱뚱한지를 알고 있냐”며 “반도체 라인에 직접 들어가 보고 안전을 논하라”고 삼성전자를 비판했다.

   
▲ 농성 100일을 맞는 반올림에게 많은 시민들이 응원과 지지의 메시지를 보냈다. 사진=손가영 기자
 

날이 어두워지면서 농성장은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온도가 떨어졌다. 농성장의 추위를 막는 건 2겹의 비닐이 전부였다.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특별히 모르겠다. 삼성 직업병 싸움은 나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 반올림 활동가들이 열심히 잘 해주고 다른 연대단위가 적극 협조해주고 진보적인 기자들이 기사를 정리해 국민에게 잘 알려줘서 가능한 일”이라고 답했다. 황씨는 “정부가 나서서 공장 시설 개선 명령을 내리고 사업자한텐 징벌적 처벌을 내리면 (삼성은) 처벌이 두려워 공장 작업 개선할 것”이라며 “삼성과 정부, 우리나라 가장 큰 단체 두 개가 짬짬이해서 노동자를 죽이고 있다”고 말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 다 같이 이겨요.”

“삼성에게 우리가 여기 있다고 언제까지 말해야 할까요”라는 말과 함께 ‘방진복이 하얗게 빛나는 밤에’ 문화제가 시작됐다. 사회를 맡은 임용현 조직국장과 손진우 한노보연 활동가는 이날 오후 3시 삼성전자가 가족대책위를 만난 것을 두고 반올림은 투명인간과 같다고 꼬집었다.

   
▲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방진복이 하얗게 빛나는 밤에' 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 폐지를 주장하며 광화문역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는 광화문 공동행동이 반올림 농성의 100일을 기념하는 ‘백일떡’을 나눠줬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시민분과 노래패 ‘막모인 사람들’은 기타, 멜로디언, 카혼을 들고 나와 민중가요 ‘한결같이’와 ‘바위처럼’, ‘희망의 나라로’를 열창했다.

피해자 가족의 사연이 소개될 때 문화제는 숙연해졌다.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동생을 떠나 보낸 정아무개씨는 “발만 빠른 연합뉴스와 한국의 유명 방송사들은 삼성의 이익만 대변하고 반올림과 피해자의 생각과 행위는 철저히 고립시켜왔다”며 “언론광고비로 한해 1조 5800억 원을 쓰는 삼성이 뿌린 대로 거둔다”고 언론을 질타했다.

삼성 반도체 직업병으로 아버지를 떠나 보낸 손성배씨는 지난해 12월31일을 이야기했다. 삼성은 교섭의 원칙을 어기고 자체 ‘보상위원회’를 만들어 피해자에게 12월31일을 보상신청 마감기한이라 통보했다. 신청서류를 준비했던 손씨의 어머니는 31일 새벽 손씨에게 ‘니 마음대로 하라’며 쇼핑백 두 개가 넘는 서류를 맡겼다. 손씨는 신청서를 내지 않았고 현재까지 어김없이 반올림 농성장을 찾았다. 손씨는 “삼성은 돈봉투 흔들면서 피해자 가족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한 것”이라면서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것이란 것을 그 어느 때보다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씨는 “사랑합니다. 우리 다 같이 이깁시다”라고 전했다.

오랫동안 반올림에서 직업병 문제를 연구한 산업의학전문의 공유정옥 반올림 교섭단 간사는 지난 12일 조정합의를 본 재발방지대책에 대해서도 끝까지 지켜봐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공 간사는 ‘3 곱하기 5’를 제시했다. △신설될 옴부즈만 위원회 구성원 3명의 한계 △위원회 활동 기한 3년의 한계 △유해인자 관리·건강영향 역학조사·건강 프로그램 등 3항 이행 감시 △옴부즈만이 낼 보고서 3개 감시 △사과·보상·예방대책 등 3개 의제 실현 등이 내용이다.

   
▲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노동자 한혜경씨와 어머니 김시녀씨가 14일 밤 문화제에 참석해 농성장 옆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 문화제에 참여한 시민들이 삼성을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노동자 한혜경씨가 가장 앞에서 '올바른 해결 촉구'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사회자들은 문화제 내내 “따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 잘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손 활동가는 24시간 농성장을 감시하는 삼성 측 보안팀의 한 직원이 김시녀씨에게 “여러분들이 무슨 얘기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어머님”이라고 말했던 사실을 전했다. 김승환 전북교육감은 공직에 있으면서도 직접 영상메세지를 보내 “이런 일을 볼 때마다 우리 노동자들 앞에 대한민국 국가가 존재하는지, 법이 존재하는지 강한 의구심이 든다”면서 “교육감이 직접적인 힘은 못되지만, 때가 되면 적극 나설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날 끝까지 문화제 자리를 지킨 권영국 인권변호사는 “(삼성이) 보상으로 대충 넘어가려고 했으나 반올림이 재발방지대책 합의를 이끌어냈다.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매우 중요한 성과를 이뤄냈고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고 말했다. 시민혁명당추진위원회에 함께하고 있는 권 변호사는 “삼성이 정보를 다 차단하는 상황에서 국회가 필요한 범위 내에서 정보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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