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 산업재해 질환과 관련해 피해자들이 사과와 피해보상, 재발방지를 주장하며 9년 넘게 싸워온 결과 재해예방대책안에 대한 합의가 타결됐다. 조정합의 노력이 시작된 이래 첫 타결이지만 3대 의제 중 사과와 보상 논의는 시작도 못 한 상태라 앞으로 남은 협상과정이 더 힘겨울 것이란 지적이 일고 있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삼성 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 삼성전자 협상단 등 조정 세 주체는 12일 사업장 내 재해예방대책 조정안에 합의했다. 지난 7월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가 보상·대책·사과 등 3대 의제를 포괄한 조정권고안을 제안한 지 6개월여 만이다.

김지형 조정위원장은 이날 최종합의 자리에서 “나머지 조정 의제인 보상과 사과는 세 주체 사이 입장 차이가 크기 때문에 추가 조정이 보류된 상태”라면서 “(이번 합의는) 세 주체의 완전한 동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상당한 진전이라 평가한다. 앞으로 원만한 합의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 삼성전자측 교섭단, 삼성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 반올림 등이 참석한 가운데 12일 서울 서대문구 법무법인 지평의 한 사무실에서 재해예방대책에 관한 조정합의가 이루어졌다. (사진=손가영 기자)
 

조정 합의된 예방 대책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삼성전자 내부 재해 관리 시스템 강화와 외부 독립기구인 옴부스만 위원회 설립이다.

내부 재해 관리 시스템 강화를 위한 방안은 △보건관리팀 조직·규모 강화 △건강지킴이 센터 신설 운영 △건강연구소를 통한 조사 및 연구 △근로자의 안전과 보건에 영향을 미치는 자료 보존기간 연장 등이다. 이 밖에도 삼성전자는 지역사회 환경단체, 주민, 대학교 등과의 소통 확대 방안도 모색하고 건강검진 및 산업재해보상신청 지원 체제도 보강할 책임을 가진다.

옴부스만 위원회는 독립적인 기구로서 내부 재해관리시스템에 대한 확인·점검을 수행한다. 위원장과 위원장이 지정하는 위원 2인으로 2016년부터 3년간 활동하며 이후 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3년 이내로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위원회는 삼성전자로부터 필요한 자료를 요청할 수 있고 △유해인자 관리실태 평가 △작업환경의 건강영향에 대한 역학조사 △종합건강관리체계 점검 등을 종합진단하고 진단 종료일로부터 3개월 이내에 종합진단보고서를 작성해 공개한다. 이들은 진단 결과 권고된 개선안의 이행 여부도 점검하고 이행점검 보고서를 작성해 공개한다. 삼성전자는 이에 대한 반론권을 가진다.

이 밖에도 옴부스만 위원회는 삼성전자 반도체 및 LCD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정보공개와 이와 관련된 영업비밀 관리와 관련된 규정의 제·개정에도 참여한다. 위원회는 화학물질 관련 산업보건 안전기준에 관한 정책을 연구하고 연구보고서를 발간하는 등 재해예방을 위한 연구 활동도 병행한다.

   
▲ 백수현 삼성전자 협상단 수석대표, 김지형 조정위원장, 송창호 삼성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 대표, 황상기 반올림측 대표가 서명한 조정합의문을 들고 있다.(왼쪽부터) (사진=손가영 기자)
 

옴부스만 위원장은 이철수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로 선정됐다. 이 교수는 현재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이며 한국노동법학회 회장 및 노사정위원회 노사관계소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김지형 조정위원장은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으로서) 재심판정절차에 오래 관여하는 동안 근로자 측의 구제신청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판정을 내리는 등 실제 노동분쟁 사안에서 노동법의 정통한 이해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의 조정합의문 발표가 끝나고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황상기씨, 삼성 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의 송창호씨, 백수현 삼성전자 협상단 수석대표 등은 조정당사자 대표로 나서 합의문에 서명했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을 거둔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서명 후 기자와의 간담회에서 “우리 유미가 병에 걸린지 조금 더 지나면 11년이다. 그동안 삼성에서 피해자 가족하고 겨우 얘기한 것이 오늘 재해방지부분”이라면서 “사과와 보상 의제는 삼성이 거부하는 바람에 아직 어떤 말도 못 하고 있다. 삼성이 반올림과 대화를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반올림은 삼성본관 앞에서 계속 농성을 할 것”이라 밝혔다.

백 수석대표는 “오랫동안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른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고 삼성전자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사과와 보상 문제에 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모든 당사자가 합의 정신을 잘 이뤄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답하며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 취재진이 법무법인 지평 로비를 가득 메우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이날 일부 반올림 활동가들은 30여 명이 넘게 온 기자를 보며 “평소에는 (반올림을) 찾아오지도 않고 지금 있는 농성장에도 오질 않더니 오늘은 이렇게 많이 왔다”면서 “이렇게나 많은 언론 중 과연 누가 제대로 된 사실을 쓸까”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일부 언론은 지난 11일 재해예방마련에 국한된 조정합의에 대해 ‘최종합의’라고 보도해 반올림의 반발을 샀다.

반올림은 오는 13일 오전 11시 삼성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조정합의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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