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본으로부터 10억 엔을 받는 대신 더 이상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불가역적’ 합의를 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을 한 마디도 듣지 않고 만들어낸 결과다. 언론은 정부의 협상결과를 포장하며 할머니들의 절규를 덮었다. 분노한 할머니들을 협상의 ‘주체’가 아닌 ‘설득의 대상’으로 만들고 협상의 책임을 일본과 야당으로 떠넘기는 등 교묘한 책임회피 전략을 쓰고 있다. 일부 극우언론은 어김없이 색깔론을 제기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보수언론이 세월호 유가족을 여론과 분리할 때 썼던 섬뜩한 방법이 재현되고 있다.

1. 정부안이 최선? 포장에 급급

세월호가 침몰하는 순간 정부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해 참사를 일으켰지만 당일 언론은 대대적인 구조가 이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사자들의 절규를 외면하고 정부의 법안이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위안부 협상은 외교참사라는 비판이 나온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협상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분노한 날 언론은 정부를 높이 평가했다.

적지 않은 언론이 정부의 입장을 받아썼다. KBS는 지난달 28일 “우리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일본을 꾸준히 압박해 온 점도 도움이 됐다”면서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 정상이 새로운 미래를 위해 국내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내린 결단이 어려워만 보이던 극적 연내 타결을 이끌어냈다”고 치켜세웠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북한군 개입설’을 보도했던 TV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는 지난달 29일 출연한 패널 4명 모두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편향적인 구성을 보였다. 조용택 조선일보 전 편집국장 대우는 “양국 간에는 정서적으로 너무 과잉대응하는 부분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정도 합의도 괜찮다고 본다”고 말했다.

   
▲ 지난달 28일 KBS '뉴스9' 보도화면 갈무리.
 

2. 피해자에 ‘아마추어’ 낙인

정부의 성과를 포장하기 위해 정부의 판단에는 ‘전문성’이 담보된다. 반면 반발하는 피해자들은 전문성이 없을뿐더러 냉철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이들로 치부된다. 세월호 때 유가족은 대한변호사협회의 자문을 받아 만든 특별법안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요구했지만 보수언론들은 유가족들이 비상식적인 요구를 하는 것처럼 보도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다는 할머니들의 비판에 “완벽한 협상은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할머니들은 협상의 주체가 돼야 한다. 그러나 언론은 할머니들을 졸지에 설득하고 달래야 할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할머니들의 분노는 ‘비전문적’ ‘비이성적’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지난 3일 TV조선 ‘가는주 오는주’에 출연한 김태현 변호사는 “할머니들을 만족시키는 해법은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채널A ‘뉴스 TOP10’에 출연한 심규선 동아일보 대기자 역시 “100% 만족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합의 후에 어떻게 대화를 나누고 어떻게 설득할지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보수신문에서도 이 같은 보도행태가 나타난다. 중앙일보는 지난달 30일 사설 ‘할머니 분노부터 풀어드리고 실질적 지원해야’에서 “박 대통령이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협상결과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청와대 “할머니 감정 가라앉힐 시간 필요”(동아일보)”, “‘풀리지 않는 노여움’ 다독이는 정부(조선일보)”등 대동소이한 기사가 쏟아졌다.

   
▲ 지난달 30일 동아일보 보도.
 

3. ‘제3의 적’ 만들기

세월호 참사 때 언론은 이준석 선장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및 구원파를 제물로 삼아 참사의 책임을 정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렸다. TV조선의 ‘유병언과 구원파 수사’ 보도는 214건에 달하기도 했다.

지난달 31일 채널A ‘뉴스 TOP10’에서 김승련 채널A 정치부 차장은 일본 언론 보도를 언급하며 “할머니들이 너무 화가 난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 언론이 이래도 되나 할 정도인데”라며 책임소재를 ‘정부’가 아닌 ‘일본’으로 돌렸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31일 “일본 정부의 악의적인 언론플레이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같은 날 동아일보 역시 “합의 왜곡보도 쏟아내는 일본 언론…지켜만 보는 아베” 기사에서 유사한 주장을 되풀이했다.

협상결과를 포장하며 책임을 전가하는 과정에서 야당에게도 불이 옮겨 붙었다. 지난달 31일 채널A ‘뉴스 TOP10’에서 김승련 정치부 차장은 “상황이 나빠지는 이유가 있다. 시민단체와 야당이 할머니들과 손잡고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야당과 시민단체가 갈등을 부추긴다는 식으로 몰아붙였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박성원 동아일보 부국장은 “(문재인 대표가) 여당이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설명이 없다. 100% 들어줘야 된다고 하는 게 속은 시원하겠지만 그런 협상은 없다”면서 야당이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 보도.
 

4. ‘여론’ 가르기

세월호 참사 때 보수언론은 진상규명을 지속적으로 요구한 ‘단원고 유가족’과 배·보상에 동의한 ‘일반인 유가족’의 틈을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다. 여론이 피해자들에 주목하는 상황에서 의견이 갈리거나 대립하는 모습을 부각해 보도한 것이다.

연합뉴스는 지난달 28일 속보로 “유희남 위안부 피해 할머니 ‘정부 하신대로 따르겠다’”기사를 내보냈는데 “만족하진 못한다”는 말은 제목에서 빠졌다. 29일 연합뉴스TV는 “피해 할머니들 ‘졸속합의’… ‘따르겠다’ 반응도” 리포트를 내보내며 의견이 갈린다는 점을 부각했다. MBC는 지난달 28일 “할머니들은 회담 결과에 대체로 불만족스러워 하셨지만 일부에서는 정부의 뜻에 따르겠다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언론은 국론도 갈랐다. 극단적인 주장을 해온 엄마부대봉사단이 지난 4일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합의 내용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국민일보는 5일 인터넷판에 “엇갈린 국론”이라고 보도했다. 일간지들은 인터넷판에 보도했을 뿐 지면에는 관련 소식을 보도하지 않았지만 MBC는 4일 이브닝뉴스에서 엄마부대봉사단 시위를 보도했다. 시청자들이 시위 내용을 주요 여론의 일부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언론이 위안부 협상에 관한 긍정적인 여론을 부풀렸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SBS는 지난달 31일 ‘한일 위안부 합의 잘했다’는 여론이 53%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지만 여론조사 문항을 보면 논란이 된 쟁점은 언급하지 않고 정부가 발표한 합의내용만 설명해 긍정적인 답변을 유도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 지난 29일 연합뉴스TV 보도화면 갈무리
 

5. 시도 때도 없이 경제타령

모든 문제를 경제적 손실로 귀결시키는 건 보수언론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민주노총이 파업해도 경제가 어렵다는 이야기부터 꺼낸다. 세월호 참사 당시엔 참사가 불황을 촉발하고, 세월호 특별법 협의가 장기화되면서 ‘민생법안’이 묶였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처럼 경제적 손실과 특정 사안을 묶으면 “당장 입을 내 손해”가 부각돼 효과적으로 여론과 분리할 수 있다.

이번에는 보수언론이 일찌감치 ‘경제카드’를 꺼내들었다. TV조선 뉴스쇼판은 지난달 29일 “‘일 관광객 늘어날 것’… ‘혐한 감정 희석’” 리포트에서 “관광업계에서는 그만큼 이번 한일협정에 거는 기대가 크다” “재일 한인사회도 관계 개선을 고대한다”며 경제적인 효과를 강조했다.

한국경제는 지난달 29일 사설 “위안부 타결 이후 한·일 경제협력 업그레이드 기대 크다”에서 “한국과 일본 경제계가 위안부 문제 타결을 크게 반기고 있다”면서 “그동안 한·일 관계 악화가 양국 경제에 미친 악영향은 매우 컸다”고 지적했다. 한국경제는 그 근거로 양국 간 교역액이 4년째 감소세라는 점을 언급했는데, 교역액이 줄어든 원인이 오로지 한일관계 경색의 결과로 보기는 힘들다.

   
▲ 지난 29일 TV조선 보도화면 갈무리.
 

6. 해결된 것 없는데 미래를 보자?

세월호 피로감을 조장하며 미래를 보자던 언론들은 이번 합의 역시 당사자들이 반발하고 있음에도 청사진을 제시하며 “미래를 보자”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그 미래는 ‘안보’, ‘경제’ 등에서 추상적으로 언급됐을 뿐 구체적이지 않았다.

지난달 29일 TV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에서 전옥현 전 국정원 1차장은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가로막던 위안부문제가 타결됐다”면서 “동북아의 안보환경에 있어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외교적 공간이 넓어졌다. 일부 아쉽지만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중앙일보는 지난달 29일 “한일 양국은 이제 앞을 보고 가자” 사설에서 “친구는 선택할 수 있지만 이웃은 고를 수 없는 법”이라며 “이번 합의를 계기로 한일양국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보도했다. 앞서 28일 SBS ‘8뉴스’는 “새 출발하는 한일…더 큰 미래 열자” 리포트에서 대동소이한 주장을 했다.

   
▲ 지난 28일 SBS 8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7. 기승전‘색깔론’에 ‘불법’낙인까지

일부 언론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색깔론을 제기하는 등 이념적이지 않은 사안을 이념갈등으로 몰았다. 지난해 8월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단식농성을 벌이자 TV조선은 그가 금속노조 조합원이라며 “정치단식 논란”을 제기했고, 조선일보는 주치의가 통합진보당 출신이라고 보도했는데, 이와 유사하다.

지난달 31일 뉴데일리는 “주도세력과 그 주변인물 중에는 과거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등에 가담했던 이들이 많다”면서 “손미희 정대협 대외협력위원장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앞두고 해산 반대 1인 시위를 했던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공영방송 이사도 가세했다. 조우석 KBS 이사는 지난달 28일 미디어펜 기고글에서 “정대협은 겉으로 ‘민족주의 장사’를 하지만, 실제론 좌파 집단”이라며 “반일 민족주의 간판 뒤에 숨어 반대한민국, 반미운동을 했다는 증거는 너무나 많다”고 주장했다.

TV조선은 농성이 사흘째 접어들자 인터넷판에 “소녀상 앞 사흘 째 집회… 불법집회 변질 우려”라는 제목을 썼다. TV조선은 “(경찰은) 촛불 문화제가 불법시위로 변질될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자막에는 ‘불법시위 대학생 석방 요구하기도’라는 문구가 나왔다. 연합뉴스는 지난 2일 관련 집회에서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의 발언을 보도하며 “그는 불법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면서 불필요한 내용을 부연했다.

   
▲ 지난 1일 TV조선 뉴스쇼판 보도화면 갈무리.
 

“세월호 참사 때보다 심각하다”

물론 이들 언론이 협상의 문제점을 짚는 보도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정부에 책임을 묻는 보도도 있다.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다. 초기에는 ‘애도’와 ‘비판’이 주를 이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여론과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분리하는 보도가 이어졌다.

정부에게 부담이 될수록 언론은 ‘흉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재협상을 할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 할머니들이 반발하고 소녀상 앞 농성이 장기화되는 것은 정부에 부담이다. 급작스럽게 ‘불법시위’ 프레임이 고개를 드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정부의 입장만을 전하고, 왜인지 질문하지 않고, 국민의 불안에 대해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식의 보도가 반복된다”면서 “청와대와 지상파, 보수신문과 종편이 주고받으며 여론을 왜곡하는 판이 안착됐다”고 지적했다.

김언경 처장은 “세월호 참사 때보다 위안부 협상 관련 보도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SBS마저 정부의 입장을 전하고 있다. 종편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세월호 때는 최소한 보도비중이라도 높았는데, 이번에는 보도비중 역시 시간이 흐르자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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