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약 50년 동안 피아노는 엄청난 속도로 진화했고, 이에 비례하여 피아노 음악도 풍성해졌다. 베토벤의 <황제> 이후에 나온 피아노 협주곡, 하면 일단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이 떠오르는데, 이 두 곡은 왜 이렇게 다를까? 그 사이에는 어떤 피아노 음악들이 세상에 나왔을까? 이 시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는 모차르트, 클레멘티, 베토벤의 이름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베토벤 이후의 피아니스트는? 쇼팽과 리스트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 두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면 그 이전에 활약한 피아니스트들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일반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피아노 교본을 써서 누구나 아는 칼 체르니, 모차르트의 제자로 이중 트릴의 명수였던 요한 네포무크 훔멜, 쇼팽의 ‘녹턴’에 영향을 준 영국 출신의 존 필드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피아노 음악은 21세기 스마트폰 기종만큼이나 현란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 시대를 헤쳐간 피아니스트 중에는 변화 자체를 거부한 존 크라머 같은 사람도 있었고, 새로운 조류에 적응하려고 최선을 다한 이그나츠 모셸레스도 있었다.

   
▲ 존 크라머(1771~1858)는 87살이나 살며 고전시대와 낭만시대를 모두 목격했다. 한때 베토벤을 능가하는 테크닉을 자랑한 그는, 낭만시대의 새로운 연주기법에 적응하기를 거부했다.
 

독일 혈통의 영국인 존 크라머(1771~1858)는 당대의 거장 클레멘티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한때 “베토벤보다 테크닉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은 크라머는 훗날 영국에서 악보 출판업을 했는데, 베토벤의 협주곡 5번을 출판하며 ‘황제’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87살까지 장수를 누리며 고전 시대와 낭만시대를 모두 겪은 그는, 낭만시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 스타일이 너무 저속하고 야만적이라 생각하여 ‘기름처럼 매끄럽게 흐르는’ 모차르트의 스타일을 고집했다. 당시 모든 피아니스트들은 작곡가를 겸하고 있었다. 크라머는 200곡의 소나타와 9곡의 협주곡 등 많은 피아노곡을 썼지만 점차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가로 여겨졌고, 살아 있을 때 이미 세상에서 잊혀졌다.   

이그나츠 모셸레스(1794~1870)는 죽음을 앞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소연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예민한 감성의 음악가’이자 ‘고상하고 신사다운 인간’으로, 크라머처럼 장수하며 고전시대와 낭만시대를 겪었다. 그는 새로운 조류에 적응하기 위해 세 번이나 연주 스타일을 바꾸었다. 젊은 시절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숭배한 고전주의자 모셸레스는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들을 동료 음악가들에게 열심히 알렸다. 그는 쇼팽, 리스트, 탈베르크의 음악을 알게 된 뒤 자기 테크닉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효과에 위축되지도 않고 경멸하지도 않으며, 오랜 전통의 가장 좋은 요소들을 유지하면서 두 악파 사이의 중용을 추구할 것”이라고 말하며 테크닉을 계속 연마했다. “쇼팽의 음악이 너무 달콤하고 연약하여 심오한 작품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던 그는, 쇼팽 자신의 연주를 들은 뒤 생각을 바꿨다. “쇼팽의 조바꿈은 아마추어가 쓴 것처럼 어렵고 비예술적으로 보였지만, 그 자신이 요정 같은 손가락으로 매끄럽게 연주하는 걸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쇼팽은 음악 연주의 세계에서 오직 한 명뿐인 독특한 존재다.”

   
▲ 이그나츠 모셸레스(1794~1870)는 급격히 변하는 피아노의 첨단 유행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모셸레스는 살리에리, 베토벤이 신뢰한 후배였고 어린 멘델스존의 스승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나누었다. 그는 8곡의 피아노 협주곡 등 많은 작품을 썼지만 쇼팽과 리스트의 그늘에 가려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음악가인 동시에 너그러운 인격자였던 그는, 급변하는 피아노의 세계를 포용하려고 꾸준히 연습했지만 힘에 부쳤다. 말년에는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주식’으로, 때로 현대음악을 ‘간식’으로 취하며 조용히 지냈다.  

존 필드(1782~1837)은 쇼팽의 녹턴(야상곡)에 직접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기억된다. 시적인 연주가 뛰어났기 때문에 “스타일도 쇼팽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거장 클레멘티의 수제자였다. 돈계산이 빨랐던 클레멘티는 어김없이 수업료를 챙겼고, 피아노 회사를 차린 뒤엔 제자에게 하루 종일 매점에서 피아노를 치며 홍보하는 일을 시켰다. 키가 크고 창백한 존 필드는 불우한 젊은 시절을 보낸 셈인데, 그가 무뚝뚝한 성격을 갖게 된 건 이런 수업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 존 필드(1782~1837)는 쇼팽의 녹턴이 자기 작품의 인기를 앞지르자 질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의 피아노 연주는 기교가 완벽했고 ‘꿈꾸는 듯한 비애’가 서려 있었다. 그는 연주할 때 표정과 쇼맨십이 전혀 없었고 불필요한 동작을 거의 취하지 않았는데, 이를 본 프란츠 리스트는 “클레멘티가 손등에 동전을 얹어놓고 가르친 게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며 비꼬았다. 그는 파리에서 쇼팽의 연주를 들었지만 “병실에서 갓 나온 재주꾼”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파리에 갓 데뷔한 쇼팽에게 쏟아진 찬사 중 하나는 “존 필드만큼 훌륭하다”는 평이었다. 존 필드는 1814년부터 녹턴(야상곡)을 발표해서 인기가 높았는데, 1830년 이후 쇼팽의 녹턴이 자기 작품보다 더 사랑받게 되자 몹시 질투했다고 전해진다. (아놀드 숀버그 <위대한 피아니스트들> p.141~147)

   
 
 

 

존 필드 녹턴 2번 C단조             
https://youtu.be/2bx66RJ1m94 (피아노 존 오코너)

 

 

 

녹턴은 파리 살롱에서 즐겨 연주된 레퍼토리였고, 악보도 가장 잘 팔렸다고 한다. 유작으로 남은 쇼팽의 ‘녹턴’ C#단조는 처음부터 녹턴은 아니었다. 1830년의 자필 악보에는 그냥 ‘느리게, 짙은 표정으로’(Lento con gran espreessione)라고 돼 있었는데, 쇼팽이 죽은 뒤 누나 루드비카가 출판업자에게 보여주면서 ‘녹턴풍의 렌토’라고 써 넣었기 때문에 ‘녹턴’으로 분류됐다고 한다.

   
 
 

 

쇼팽 녹턴 C#단조 (유작)           
https://youtu.be/m5qeuVOIbHk (피아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멜랑콜릭한 정서로 가득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협주곡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들려준다. 훔멜, 필드, 모셸레스, 탈베르크, 칼크브레너 등 19세기 전반에 활약한 피아니스트들은 작곡가를 겸했는데, 이들이 쓴 피아노 협주곡들도 한결 같이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과 비슷한 우수어린 느낌이다. 19세기 전반, 낭만시대 초기의 음악가들이 공유한 정서, 그것은 ‘멜랑콜리’가 아니었을까?  

슈타미츠, 살리에리, 디터스도르프 등 18세기 후반의 작곡가들은 대체로 갈랑트 스타일*의 화사한 작품을 썼다. 그것은 고전시대 초기 궁정 음악에서 기대되던 일반적인 정서였고, 자연스레 ‘음악의 규범’(norm of music) 또는 ‘보통 음악’(normal music)으로 간주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19세기 초에는 이 멜랑콜리가 ‘음악의 규범’이자 ‘보통 음악’의 특징이 된 게 아닐까? 이 시기, 음악가들은 모두 자유로운 개인이었지만 성공의 문은 좁았고 생존은 불안했다. 갑자기 펼쳐진 자본주의와 시민사회에서 음악가들은 마음속에 꿈과 사랑을 잃지 않으려 했다. 예술가의 내면과 팍팍한 현실의 충돌이 결국 ‘멜랑콜리’라는 정서로 표출된 게 아닐까?  

   
 
 

 

모셸레스 피아노 협주곡 3번 G단조     
https://youtu.be/WmILM1ruuFE (피아노 미하엘 폰티)

 

 

 

미학자 김동규는 ‘멜랑콜리’를 한 마디로 “사랑과 죽음이 교차하는 심미적 감정이자, 서구 예술 전체를 지배하는 근본 정조”라고 정의했다. “사랑에서 멜랑콜리는 시작된다. 미지근한 사랑이 아니라, 광적인 사랑에서 멜랑콜리는 탄생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은 누구나 멜랑콜리커가 될 수 있다. 멜랑콜리커는 격렬한 정념의 힘을 통해서 일상인의 사유범위와 상상력의 한계를 초과하는 영역에 접근한다.” (김동규 <멜랑콜리 미학>, p.357~p.358) 서구 예술의 근본 정조인 멜랑콜리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낭만시대 초기 음악의 특징이며, 특히 이 시기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예술가는 시대의 자식이지만, 그 시대를 뛰어넘는 독창성을 발휘할 때만 살아남고 기억된다. 18세기 후반, 얼핏 비슷하게 들리는 수많은 음악 중 모차르트 음악이 군계일학처럼 뛰어났다면, 19세기 전반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오늘날,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널리 연주되지만 이와 흡사한 정조를 들려주는 훔멜, 필드, 모셸레스, 탈베르크, 칼크브레너 등 다른 작곡가들의 협주곡들은 거의 다 잊혀졌다.

* 갈랑트(gallant) 스타일 : 18세기 중반, 귀족 중심의 어럽고 복잡한 푸가를 버리고 노래하기 쉽고 단순명료한, 선율 위주의 음악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 요한 크리스찬 바흐, 요한 슈타미츠 등이 이끈 이 새로운 흐름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에게 흡수되어 근대 음악의 씨앗으로 발전했다. ‘갈랑트’란 말은 ‘감각있고, 섬세하고, 교양있다’는 뜻의 형용사로, ‘이성에게 멋지게 보여서 사랑을 구한다’란 뉘앙스도 있다고 한다. 19세기 초 낭만시대의 협주곡들이 들려주는 멜랑콜릭한 분위기도 일종의 ‘구애하는’ 느낌 아닌가 생각되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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