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로 알려진 HIV 바이러스 감염은 더이상 ‘죽음의 병’이 아니다. 의약품의 발달로 당뇨나 고혈압처럼 관리만 잘하면 얼마든지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질환이 됐다. ‘문란한 성생활’과는 더더욱 관계없고 오히려 다른 바이러스 질환보다 전염 가능성이 낮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로 인한 질환일 뿐이다. HIV 감염인 인권운동이 10년 넘게 알려 온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은 의학의 발전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1981년 한국에 HIV 바이러스 보균자가 처음 신고된 뒤 30여 년이 흘렀으나 사회적 혐오와 차별은 그때와 다름없이 공고하다.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Korean Network of PLWHA)는 세계에이즈의 날을 하루 앞둔 11월30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환경재단에서 "한국의 에이즈 30년, 낙인을 남기다"라는 주제로 기자설명회를 열었다. KNP+는 ‘2015년 HIV/AIDS 10대 이슈’를 선정해 감염인을 향한 혐오 실태를 고발하고 감염인 스스로 인권증진을 위한 운동에 앞장설 것을 촉구했다.

“환자 인권에 가장 민감해야 할 의료기관이 혐오에 가장 앞서고 있다”

KNP+가 선정한 10대 이슈 중 절반 이상이 의료기관과 정부의 차별행위다. 특히 의료진의 경우 혐오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2015년 서울시보라매병원은 HIV 감염인의 치과 스케일링을 거부했다. 이 병원은 이후에도 감염인이 치과를 내원했을 때 파티션·진료용 의자 등에 비닐을 씌워놓고 폐기물통에 HIV 표식을 붙여 놓는 행태를 보였다. 환자가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Korean Network of PLWHA)는 세계에이즈의 날을 하루 앞둔 11월30일 서울 중구 정동 환경재단에서 <한국의 에이즈 30년, 낙인을 남기다> 기자설명회를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2014년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은 “피가 튀는 것을 가릴 막이 없다”는 이유로 감염인의 중이염수술을 거부했다. 국립경찰병원도 감염인의 치과·피부과 진료를 거부한 바 있다. 2011년 신촌세브란스 병원이 ‘특수장갑’이 없다는 이유로 감염인의 인공관절 수술을 거부해 큰 논란을 빚었는데, 전혀 개선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해당 병원은 모두 ‘의료기관 HIV감염인 상담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종합병원이다.

발제에 나선 손문수 KNP+ 대표는 “특수장갑, 가림막, 전용의자 등은 필요없다”며 “HIV 바이러스는 피부, 침 등을 통해 전염이 되지 않는다. 의학지식이 있는 의사들이 아는 것과 상반된 혐오를 보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밝혔다.

항간의 편견과 다르게 HIV는 감염경로가 매우 제한적이고 예상수단도 충분히 존재한다. 주 감염 경로는 성 접촉, 수혈, 수직 감염, 주사기 공동 사용 등이고 상대가 HIV에 감염되었다는 것이 전제다. 성 접촉은 HIV에 감염된 사람과 성기를 삽입한 행위에 한하고 수혈의 감염 경로는 감염인의 혈액을 수혈받았을 경우다. 수직 감염은 HIV에 감염된 산모가 아기가 감염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주사바늘을 통한 감염 경로는 감염인을 찌른 주사 바늘에 찔렸을 경우다. 성관계시 질 삽입 성교로 감염되는 확률은 0.1~0.2%, 항문 성교는 0.1~3%, 수혈은 90%, 수직 감염은 25~30%, 주사바늘에 찔렸을 경우는 0.3%다. 피나 침 몇 방울이 튀긴다고 감염되는 병이 전혀 아니다. 성 접촉 시의 예방수단도 충분해 감염을 통제할 수 있다.

정부의 무성의·방관·혐오조장… 더욱 조직화되는 혐오

손 대표는 특히 현재 중증 감염인이 갈 수 있는 요양병원이 전무한 현실을 강조했다. 사회적 낙인과 차별로 의료기관을 피하다 HIV 감염을 조기 발견하지 못하거나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해 중증환자가 되는 감염인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이들은 대부분 와상상태이거나 기초생활수급권자 혹은 가족과 단절돼 돌볼 사람이 없는 환자다. 에이즈 환자를 위한 장기요양병원 지원이 시급한 상황인데 정부는 2016년 감염인 장기요양지원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장기요양사업 위탁병원을 지정하지 않고 있다.

   
▲ HIV 감염인의 인권 증진을 응원하는 빨간 리본
 

감염인 당사자 윤가브리엘씨는 “정부는 올해 메르스 사태 당시 국립중앙의료원을 거점병원으로 지정하며 노숙인·에이즈 환자 등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환자를 내쫓았다. 어렵사리 다른 종합병원에 입원한 환자 2명은 입원비가 걱정돼 퇴원을 하기도 했다”며 정부의 무대책 행정을 비판했다.

윤씨는 “감염인의 출입국을 제한하는 정책도 그대로”라고 밝혔다. 유엔인종차별철페위원회는 지난 5월20일 한국 정부에 인종차별을 양산하는 어떠한 규정과 정책도 폐지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지난 2009년 한국에서 한 외국인 강사가 재고용의 조건으로 에이즈 검사를 요구받은 인권침해에 대한 조치였다. 반기문 UN 사무총장도 직접 “한국은 에이즈 환자 출입국을 제한하는 11개 국가 중 하나”라며 시정을 촉구한 바 있다. 현재 한국은 E2(회화지도), E6(예술흥행), E9(비전문취업) 등의 비자에 대해 ‘에이즈검사’를 발급조건으로 두고 있다. 윤씨는 “외교부, 법무부에 확인해봤는데, 정부는 수용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정욜 인권활동가도 발제에 나서 정부기관의 무분별한 정보수집과 혐오조장세력 방관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씨는 “올해 4월 국정원은 공무원임용예정자의 신원조사 사항에 ‘질병자료’를 포함시켰다”며 “감염인들이 자신의 HIV감염사실을 어느 기관까지 알고 있을지,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불안해하며 공무원 공부를 포기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정씨는 “이후 국정원은 신원조사 항목을 대폭 생략했지만 그동안 수집했던 질병자료를 폐기하고 일체의 질병자료 수집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씨는 조우석 KBS 이사의 혐오발언을 직접 규탄했다. 조 이사는 지난 10월8일 ‘동성애·동성혼 문제 어떻게 봐야하나’ 토론회에서 “더러운 좌파는 동성애자 무리”라면서 한 인권활동가에 대해 직접 “그가 에이즈 환자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의 애인은 에이즈 환자”라고 말한 바 있다. 정씨는 “정부는 비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혐오를 조장하고 확산하는 세력들에 침묵하고 동조하는 행동들을 보였다”며 “동성애혐오와 에이즈 편견이 더 가시화되고 조직화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감염인 수감자 건강권 묵살돼… 성교육은 ‘에이즈 혐오’를 조장

이외에도 정씨는 마약법 위반으로 구속된 트렌스젠더 감염인이 구치소에서 심각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는 상황도 지적했다. 의료진이 직접 접견해 “병원에 입원하는 게 굉장히 시급하다”는 소견을 두 차례 전달했으나 검찰은 “생명을 보전할 수 없을 정도로 염려가 있는 경우라고 보기 어렵다”며 입원을 위한 형집행정지 처분을 기각했다.

정씨는 마지막으로 청소년 HIV감염인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예방 교육이 진행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2014년 신규감염인 중 24세 미만 청소년은 216명으로 전체 18%를 차지하는데, 청소년 누적 감염인 수가 6.8%임을 고려하면 근래 청소년 HIV 감염인이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씨는 “성교육 현장에서는 여전히 건전한 성문화를 강조하며 에이즈를 불결하고 문란한 질병으로 낙인찍거나 감염인의 처량한 모습을 부각시킨다”며 “청소년 HIV 감염 문제에 대해 국가적 차원에서 시급히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염인 당사자들 “숨지 않고 스스로 차별·낙인 경험 조사나설 것”

HIV 감염인들이 다방면의 혐오와 차별을 감내하며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KNP+를 중심으로 한 감염인 당사자들은 “자신을 혐오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사랑하며 사회구성원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라 밝혔다.

KNP+는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와 함께 UNAIDS의 지원을 받아 ‘HIV/AIDS 낙인 지표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낙인 지표 조사는 HIV 감염인에 대한 차별·낙인 실태에 대한 객관적 평가지표를 만들어 정책 결정에 반영하기 위한 것으로 미국, 중국, 인도, 태국 등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진행됐다. 이 조사는 가장 큰 특징은 감염인 당사자가 스스로 조사의 주체가 되는 점이다. 조사의 전 과정에 당사자가 결합해 문제에 직접 대응하면서 감염인 커뮤니티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이 주 목적 중의 하나다. 현재 조사원은 15명이 모였으며 내년 4월 조사를 마무리해 9월 보고서를 완료할 예정이다. 감염인 150명 조사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심층인터뷰 대상자는 10명이다.

아래는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가 꼽은 2015년 HIV/AIDS 10대 이슈다.
1. 에이즈환자가 갈 수 있는 요양병원은 없다
2. 전용체어 없다고 진료거부, 차별진료한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3. 진료비 지원 예산 불안. 치료하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4. 메르스에 무능한 정부, 가난하고 취약한 환자를 내쫓다
5. 신속검사 확대, 상담이 수반되어야 한다
6. 7년의 싸움, 그러나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권고 불수용한 한국정부
7. HIV감염인의 건강권 묵살한 교정시설
- 아파도 형집행정지 처분을 못 받고 있는 트랜스젠더 감염인
8. 공무원 임용자의 질병정보 수집하는 국정원
9. 가시화되고 조직화되어 가는 '동성애혐오'와 더 강화되고 있는 '에이즈편견'
10. 20대 HIV감염인 증가하는데도 성교육정책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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