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입에서 튀어나온 인민’

20일 조선일보 사설 제목이다. 변성호 전교조 위원장이 민중총궐기 때 “오늘 우리의 투쟁은 15만 노동자, 민중, 인민, 시민, 청년 학도들이 함께하고 있다”고 발언한 점을 문제 삼았다.

조선일보는 “‘인민’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말이긴 하지만 우리 국민은 거의 쓰지 않는 단어”라며 “우리는 ‘국민’이라고 쓰고 북한에서 ‘인민’이라고 하는 것이 굳어진 지 오래”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망해버린 엉터리 이념을 남의 집 자식들에게 심어 놓으려는 교사라면 결코 묵과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인민’ 단어 하나를 통해 사상까지 의심한 것이다. 

북한이 ‘인민’이라는 단어를 주로 쓰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선 안 되는 이유가 되진 않는다. 조선일보의 주장과 달리 ‘인민’과 ‘국민’은 명백히 의미가 다른 단어다. 국민은 한 국가의 구성원을 뜻하는 데 국가주의가 내포돼 있다. 피지배계층으로서 광범위한 민중을 의미하는 ‘People’을 번역할 때 가장 적확한 단어는 인민이다. 링컨의 연설 역시 “인민의, 인민의 의한, 인민을 위한”이라고 번역돼왔다. 

   
▲ 20일 조선일보 사설
 

시사인에 따르면 헌법 초안을 마련한 헌법학자 유진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밝혔다. “미국 헌법에 있어서도 인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citizen)과는 구별되고 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다.” 제헌헌법 초안에는 ‘인민’이라는 단어가 있기도 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전교조 위원장이 쓴 ‘인민’의 뜻을 살펴야 한다. 조선일보도 언급했다시피 명백히 국어사전에 등재된 단어이기도 하다.

같은 보수언론조차 필요할 때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쓴다. 동아일보 허승호 논설위원은 지난해 1월에 쓴 횡설수설에서 “민주(民主)는 글자 그대로 ‘인민이 주권자’라는 의미”라고 썼다. 이진녕 논설위원이 지난해 2월에 쓴 횡설수설에서 “군주는 지배계층(귀족)보다 피지배계층(인민)의 지지를 얻는 것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마키아벨리는 조언했다”면서 피지배계층을 ‘인민’이라고 부연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보수신문이 건국대통령으로 추앙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도 인민이라는 말을 썼다. 물론 분단 이후에 말이다.1949년 2월 국민보에 따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미국 인민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집들을 공산파 침격에서 방어하게 될 시일을 재촉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해 8월 국민보 기사를 보면 “옹진반도의 전투 보고는 내가 믿기로는 침략을 악하다 혐의해서 자치에 대한 인민의 권리를 존중하는 모든 인민을 고무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통일은 미래다’라는 슬로건으로 내걸고 다양한 기획보도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통일나눔펀드를 대대적으로 모금하고 있기도 하다. 진정 통일을 지향하는 신문이라면 ‘인민’ 한 마디를 언론의 공식입장격인 사설로 만들어 종북몰이에 나서는 대신 생산적인 논의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 기사추가 /

전교조측은 20일 "총궐기 당일 위원장은 '인민'이 아니라 '빈민'이라고 발언했다"면서 :조선일보에 해당 사설을 홈페이지에서 내리고 종이신문에 정식 정정하도록 요구했다"고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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