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일부수정 11월 19일 오후 8시49분]

정부의 국사교과서의 국정전환 강행에 천주교의 교단 차원에서 첫 반대 목소리가 나와 주목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19일 국정교과서 전환이 역사를 독점하는 행위로 민주주의 뿐 아니라 카톨릭 교리에도 반한다며 원점에서 다시 논의하라고 촉구했다.

이 같은 입장은 주교회의 소속 대사회분야 업무를 관장하는 정의평화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는 유흥식 주교의 명의로 이날 오후 발표됐다. 주교회의는 2~3일 전부터 모든 주교의 견해를 들어 이 같은 입장을 내게 됐다고 밝혔다. 이영식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미디어부장은 19일 오후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정의평화위원회는 대사회적인 업무를 하는 곳으로 이날 발표는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을 밝힌 것”이라며 “여러 주교의 의견을 다 들어서 2~3일 전부터 초안이 나와 준비한 결과 발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남녀 수도자 명의의 입장 표명은 있었지만 교단 차원의 반대 목소리는 이번이 처음이다.

유 주교는 이날 발표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반대합니다’라는 성명에서 정부의 국정교과서 추진에 대해 “그동안 역사학계와 시민 사회가 지속적으로 제기한 비판적인 논의나,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반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음에도, 정부와 여당은 이러한 합리적 견해를 무시하며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발표하고,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인간의 참다운 발전과 인간의 모든 차원을 존중하고 신장시키는 사회로 발전”(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1항)하기를 원하는 교회의 사회적 관심에 따라 반대 입장을 밝힌다고 유 주교는 전했다. 

   
유흥식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주교.
@연합뉴스
 

유 주교는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를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정당한 방법과 절차에 의해 선출된 정부와 지도자를 존중하지만 국가권력의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권력의 행사가 인간 존엄성, 공동선과 보조성의 원리를 확고히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간추린 사회교리’를 들어 “진리 추구를 위해서 독립된 권위를 유지해야 할 학문 영역과,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사고할 권리를 지닌 시민 사회를 향해서 국가는 보조하는 방식으로만 개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 주교는 “현시점에서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추진을 통해서 교과서를 독점하겠다는 것은 가톨릭 사회교리가 근간으로 제시하는 보조성의 원리 및 민주주의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라며 “이 같은 사고 자체가 한국사의 흐름 속에 이미 사라져간 권위주의 시절의 사고와 맞닿아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글로벌 시대를 주도하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현대 한국사회의 문화적·학문적 수준이 한국사 교과서를 자율적으로 제작할 수 없을 만큼 낮지 않다”고도 지적했다.

유 주교는 또한 ‘기존 교과서들의 이념적 편향성과 자학적이고 패배적인 역사관 때문’이라는 정부 주장에 대해 “역사학계와 국민 대다수가 동의하지 않으며, 기존의 검인정 제도의 보완을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도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채 특정 역사관을 지지하고 전파해 왔다”며 “국정으로 발행되는 한국사 교과서에 담길 내용이 정부와 여당의 그와 같은 정치적 목적과 관련되는 것들이 아닐까 염려된다”고 우려했다. 

유 주교는 한국사 전공 학자들의 집필 거부에도 비공개로 집필자를 선정하는 것을 두고 “한국사 교과서는 역사가들이 학자적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며 “한국사를 제대로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특정한 역사관이 서술될 수 있다고 우려된다”고 전했다.

   
국정교과서 이미지
 

‘현세 사물의 정당한 자율성’(사목 헌장 36항)을 들어 유 주교는 “종교를 포함하여 정치 등 그 어떤 외적인 요인도 인간이나 사회, 학문의 자율성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며 “역사의 서술 역시 역사학이란 학문의 정당한 자율성(사목헌장 59항)을 기반으로 학문적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학자들의 양심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기술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유 주교는 국정 교과서를 반대하는 국민들을 향하여 ‘종북’ 또는 ‘좌파’라는 이념적인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는 점을 지목하면서 “국민 통합을 이끌어야 할 정부가 오히려 국론 및 국민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라며 “현재 추진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정책을 거두고 원점에서부터 새롭게 논의하기를 거듭 촉구한다”고 밝혔다.

다음은 유흥식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이 19일 오후 발표한 입장 전문이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반대합니다

2015년 11월 3일, 정부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확정 고시했습니다. 그동안 역사학계와 시민 사회가 지속적으로 제기한 비판적인 논의나,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반대한다는 여러 여론조사 결과가 있음에도, 정부와 여당은 이러한 합리적 견해를 무시하며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발표하고,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인간의 참다운 발전과 사회가 인간의 모든 차원을 존중하고 신장시키는 사회로 발전”(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1항)하기를 원하는 교회의 사회적 관심에 따라, 현재 전개되고 있는 여러 상황들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표시하며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추진에 대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1.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를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정당한 방법과 절차에 의해 선출된 정부와 지도자를 존중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권력의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권력의 행사는 인간 존엄성, 공동선과 보조성의 원리를 확고히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417항 참조).

보조성의 원리는, 민주주의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 국가권력의 범위와 한계를 마땅히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치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시민 단체에 봉사하며, 결과적으로는 시민 단체의 구성원인 개인과 집단에게 봉사한다는 ‘시민 사회의 우선성’(「간추린 사회교리」, 418항 참조)의 원칙에서 재확인됩니다. 그러므로 진리 추구를 위해서 독립된 권위를 유지해야 할 학문 영역과,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사고할 권리를 지닌 시민 사회를 향해서 국가는 보조하는 방식으로만 개입해야 합니다.  

현시점에서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추진을 통해서 교과서를 독점하겠다는 것은 가톨릭 사회교리가 근간으로 제시하는 보조성의 원리 및 민주주의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입니다. 한국사 교과서를 정부가 발행하고 보급하겠다는 사고 자체가 한국사의 흐름 속에 이미 사라져간 권위주의 시절의 사고와 맞닿아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글로벌 시대를 주도하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현대 한국사회의 문화적·학문적 수준이 한국사 교과서를 자율적으로 제작할 수 없을 만큼 낮지 않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를 앞장서서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2.  한국사 교과서는 역사가들이 학자적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서술해야 합니다  

정부와 여당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가 필요한 이유로, 기존 교과서들의 이념적 편향성과 자학적이고 패배적인 역사관 때문이라고 설명해 왔습니다. 이는 역사학계와 국민 대다수가 동의하지 않는 주장일뿐더러, 정부와 여당이 그러한 견해를 고수한다 하더라도 기존의 검인정 제도의 보완을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이러한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채 오히려 그간 여러 차례에 걸쳐 특정 역사관을 지지하고 전파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국정으로 발행되는 한국사 교과서에 담길 내용이 정부와 여당의 그와 같은 정치적 목적과 관련되는 것들이 아닐까 염려됩니다. 

현재 정부에서 주도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은 한국사를 전공한 대다수 학자들의 집필 거부 선언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집필자를 비공개로 하여 진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정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국민들조차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한국사를 제대로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특정한 역사관이 서술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합니다. 무엇보다 앞으로 미래의 한국사회를 이끌어나갈 젊은 학생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이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현세 사물의 정당한 자율성’(사목 헌장 36항)을 존중합니다. 이는 종교를 포함하여 정치 등 그 어떤 외적인 요인도 인간이나 사회, 학문의 자율성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자율성은 학문 발전의 전제이며, 학문의 발전은 사회 발전의 토대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서술 역시 역사학이란 학문의 정당한 자율성(사목헌장 59항 참조)을 기반으로 학문적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학자들의 양심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기술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한국사 교과서는 정부가 아니라, 열린 사고를 바탕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도록 역사학계와 역사학자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3. 시민의 정당한 참여를 장려하고 민주주의의 절차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시민 단체와 여론의 제언을 존중하며, 국정화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와 그 절차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합니다. 정부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 고시 이전부터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거치는 과정을 충실히 하지 않은 채 밀어붙이듯이 강행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시민 단체 및 국민의 여론은 전혀 존중받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정부와 여당은 국정 교과서를 반대하는 국민들을 향하여 ‘종북’ 또는 ‘좌파’라는 이념적인 공격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는 국민 통합을 이끌어야 할 정부가 오히려 국론 및 국민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인 사회 다원주의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간추린 사회교리」, 417항 참조)를 크게 훼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 국가의 참된 발전과 국민의 진정한 화합은 시민들의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의사 개진을 통하여 비로소 가능합니다. 정부와 여당은 지금이라도 국민 여론과, 역사학계 그리고 시민 단체의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국민 통합을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동등한 책임과 결정의 참여가 가능하고 더욱 증대”(바오로 6세, 「팔십주년」, 47항)되기를 바랍니다. 현재 정부가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는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자율성을 무너지게 하고, 시민 사회의 건강한 여론을 차단시키며,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할 수 있는 매우 중대한 사안입니다. 

따라서 정부와 여당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가 야기하는 문제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깨닫기를 바라면서, 현재 추진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정책을 거두고 원점에서부터 새롭게 논의하기를 거듭 촉구합니다.

2015년 11월 19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유흥식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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