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과거 유신정권 때 신문기고까지 하면서 국사 국정교과서 발행에 반대했다가 지금은 어떻게 국정교과서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 기술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판단이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질 수 있느냐는 지적이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 첫 국사 국정교과서가 나온 것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강행한 이후인 지난 1974년으로, 이 때 국사학계에서는 반대가 많았다. 특히 김정배 국편위원장은 그 1년 전인 1973년 6월 25일 동아일보 5면 <국정교과서 국정에 대한 각계의견> 중 ‘다양성 떠난 소수저자의 독단 우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쓰는 등 반대에 가장 앞장선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나는 국사가 획일적으로 되는 것에 반대한다”며 “획일적인 역사란 있을 수 없다. 역사연구의 중요성이 사건의 단순한 기술보다 올바른 이해와 해석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과학의 발달에 따라 사료의 개발에 따라 역사 내용 자체도 달라질 수 있는 마당에 다양성을 말살하고 획일성만을 찾으려는 것은 위험하다”며 “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할 경우 교과서마다 한쪽에 치우쳤던 모순은 시정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그것도 그리 큰 기대는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국사학자들 누구나가 약점이 있다고 할 경우 소수저자 만에 의한 교과서는 독단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으며 자유경쟁에 의한 오류 보완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첫 국사 국정교과서가 나온 이후에도 김 위원장은 교과서 내용상의 모순점과 오류까지 상세하게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1974년 6월 ‘창작과비평’ 6월호 특집 ‘국사교과서의 문제점’ <상고사에 대한 검토> 편에서 국사 국정교과서의 중학교책과 고등학교책이 각각 다르게 기술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청동기문화’에 대해 고교책의 경우 청동기문화의 상한선을 고북쪽지역이 BC 10세기경, 남쪽이 BC 6세기 전이라고 기술한 데 반해, 중학교 책은 BC 7, 8세기에 시작됐다고 기술했다며 “양쪽의 편년표를 보면 서로 다른 연대를 갖게 됐고, 고교책은  앞의 내용과는 달리 부록의 국사년표에서 또다른 연대관을 갖게됨으로써 혼동이 일어나게 됐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문화권’ 설명 부분에 대해서도 “고교책이 문화권을 설명하는 데서 남방문화권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양자강 이남을 남방문화권으로 표시하고 있다”며 “이는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다른 설명이 붙여지겠지만 중국 고고학계에서 남방문화권이란 말은 통용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일본 학게에서 왕왕 화남지역을 그와 같이 부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고 비판했다. 

철기문화 전래 문제의 기술에 대해서도 김 위원장은 “중학교 책의 경우 ‘서기 전 3·4세기경의  전국시대에 연제 등 중국 서북부지방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동쪽으로 이동하게 됐다’, ‘이들이 중국에서 발달한 철기문화를 우리 나라에 전하게 됐다’ 등 중국 유이민이 흘러들어오는 사실과 철기문화의 개시를 연관시키고 있다”며 “이에 반해 고등학교 책은 ‘대동강 지역의 토착사회에서도 이미 철기를 가지고 있었으나…’로 기술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나라의 철기문화가 한쪽은 중국에서 들어왔고, 또 한쪽은 토착사회의 철기문화를 인정하는 양설이 되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1974년 기고했던 계간 <창작과 비평> 1974년 여름호 표지.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의 국사 국정교과서 상고사 부분 편 비판 글. 사진=창작과 비평.
 

이 같은 학계의 비판을 두고 경향신문은 1974년 7월 30일자 5면 <진통겪는 국사학계>에서 “74학년도부터 문교부가 초·중·고 국사교과서를 모두 국정으로 바꾸면서 불붙기 시작한 국사교과서 논쟁은 지난 6월 창작과 비평에 강만길, 김정배, 이성무, 송찬식 교수 등 젊은 학자들이 극렬한 비판을 발표한 데 이어 26일에는 이병도 학술원 회장과 민간사학자들로 구성된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축이된 국사교과서 평가회가 새 국정 국사교과서를 ‘식민지 사관을 흉내낸 천박한 식견’이라고 비난하고 나서 사학계와 일선교사를 당황케했다”고 전했다.

김정배, 이성무(전 국사편찬위원장) 등 당시 젊은 학자 뿐 아니라 친일사학계의 대부인  이병도 교수까지 국정 국사교과서를 비판한 것이다.

특히 이 때 김정배 위원장의 국정교과서 비판은 언론보도 뿐 아니라 당시에도 많은 연구서와 논문에 인용되는 대표적인 교과서 발행체제관의 하나였다. 그런데도 본인이 지나 3월 국사편찬위원장이 된 이후 지금은 자신이 비판하던 국정교과서 제작을 지휘하고 앞장서고 있다. 

이에 대해 김정배 위원장은 지난달 12일 정부 세종청사 브리핑에서 자신이 1970년대 암울한 시대에, 민주화를 외치는 시기에 저는 검·인정을 주장한 사람이라면서도 “그것은 시대도 그리로 가야 되고 역사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가는 게 민주화를 위해서 옳다고 봤다”며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 그렇게 된 주장이 지금에 와서 더 꽃을 폈어야 되는데, 2년 전에 역사학의 이념문제가 논란이 돼서 파동을 겪는 것을 보면서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1973년 6월 25일자 5면
 
   
경향신문 1974년 7월 30일자 5면.
 

그는 특히 검인정을 하면서 (출판사와 저자가) 잘못할 수 있는데도 교육부 시정명령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고, 대법원에까지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봤다며 “이런 점에서 우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김 위원장은 지난달 23일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과거 민주화를 외치던 시기 검·인정 교과서를 주장했으나 40년이 흐른 지금, 검정 역사 교과서가 도입됐지만 다양한 사관(史觀)이 풍성한 민주화를 더 꽃피웠는지 의문”이라며 “오히려 한쪽으로 편향된 교과서가 넘쳤다”고 주장을 폈다. 

교과서를 국가가 독점해서 써야 하느냐, 학자와 출판사에 맡겨야 하느냐에 대해 김 위원장은 41년 전 ‘획일적인 역사에 반대한다’는 판단을 내려놓고 이제와서 그 판단을 왜 접었는지에 대해서는 답변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성원 국사편찬위원회 역사교과서개발지원단 연구사는 10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우리 나라가 남북이 분단된 특수한 상황이며, 역사적 해석에 대한 견해 차이가 해소가 되지 않아 국론분열과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고 있기에 역사를 보는 방법이 사회적으로 합의되기 전까지는 국가가 책임지고 역사교과서 발행함으로써 다양한 시각을 균형을있게 반영이 필요하다는 것이 김 위원장의 판단”이라고 전했다.

전 연구사는 그 밖의 입장 변화에 대해서는 “그것은 (본인이 하신 말 외에) 답변을 드릴 것이 없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장 비서실 비서관은 “당시 상황과 지금 상황이 달라진 부분에 대해 이미 언론 등에 인터뷰한 것 외엔 (김 위원장이) 따로 말씀을 주지 않는다”고 전했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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