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사는 건물에는 아무나 드나들 수 없었다. 서울 ‘부촌 1번지’라 불리는 지역에 있는 주상복합아파트였다. 운이 좋아 삼엄한 경비를 건너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머릿속에 ‘특종’ ‘단독’ 두 단어로 가득했다.

무소불위 같은 기업의 전직 임원이었던 그를 취재하고 있었다. 과거 총수 일가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던 그의 불법 행위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 논란이 일고 있었다. 수 십 년간의 입지전 끝에 조직 실세 자리를 차지했던 그는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를 풍겼다.

그에게 명함을 건네는 내 손은 떨리고 있었다. 보통 기자를 만났을 때의 긴장감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논란에 대해선 아무런 질문도 하지 못 했다.

‘그’를 만난 직후 머릿속에 ‘특종’ 대신 찾아와 부끄럽게 한 기자가 있었다. 어느 권력자를 만나도 하고 싶은 질문을 다 쏟아낸 기자다. 이탈리아 출신의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1929년 ~ 2006년)에 대해 얘기할까 한다.

   
오리아나 팔라치가 1979년 리비아 군용 텐트에서 무아마르 알 카다피 최고지도자를 인터뷰하고 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혁명투사이며 정의와 자유의 전사를 자임하는 당신이 어떻게 그 돼지 같은 (우간다 독재자인) 이디 아민을 친절하게 보호해줄 수 있는 겁니까?”

1979년 12월 팔라치는 망설임 없이 물었다. 리비아의 30대 독재자인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이 질문을 받았다. 인터뷰 장소는 전운이 감도는 그의 군용 텐트였다.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카다피는 42년 간 철권을 휘두르다 2011년 북아프리카‧중동에 들불처럼 번진 반정부 시위 ‘아랍의 봄’에 무너져 독재 집권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인터뷰 당시만 해도 그에 대해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의 제국주의에 맞설 민중투사로 주목하는 시선도 있었다. 그런 그가 우간다의 ‘돼지 같은’ 독재자인 아만을 비호하는 이중적 모습을 팔리치가 인터뷰에서 지적한 것이다. 그의 오랜 독재를 직감해 그런 질문을 던졌을지 모를 일이다.

어떤 권력자도 팔라치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카다피를 만날 수 있는 기자도, 그런 질문을 하는 기자도, 그런 질문을 하고도 신변이 무사할 수 있는 기자도 당시 팔라치가 유일했을 것이다. 오히려 권력자들은 그가 저널리즘에 관한 신화를 쓰는 데 보탬이 됐다. 인도의 최초 여성 총리 인디라 간디, 노벨상을 수상했던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 덩샤오핑 중국 국가 주석,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 등 수많은 권력자를 인터뷰했다.

팔라치의 인터뷰 방식은 영미권 대학 저널리즘 교재에서 소개된다. 공격적인 질문으로 상대를 지치게 하거나 자극한 뒤 진심을 털어놓게 하는 식이다. 키신저는 그와 인터뷰한 뒤 “내 인생 최대 실수”라고 후회했다. 팔라치는 자신의 인터뷰 모음집 서문에 “수 천만 가지의 분노를 품고 인터뷰에 임했다”고 썼다. 그와 인터뷰하지 않으면 ‘세계적인 명사’가 아니란 얘기가 나왔다.

재밌는 일화 하나 소개하고 가자. 팔라치가 무슬림 여성 성차별에 대해 집요하게 묻자, 이란 최고지도자였던 루홀라 호메이니는 참다못해 자리를 뜬다. 팔라치는 박차고 나가는 그에게 이렇게 독설을 날린다. “쉬하러 가십니까?”

   
오리아나 팔라치(1929년 6월 29일 - 2006년 9월 15일)
 

인터뷰 방식도 도드라졌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문장력도 탁월했다. 팔라치는 당시 뉴저널리즘으로 분류됐던 문학적 저널리즘을 선보였다. 3자의 관점에서 현상이나 인터뷰 내용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텍스트(기사)의 1인칭 주인공이 됐다. 풍경이나 몸짓 등 주변과 상황을 표현하는 내러티브 기사였다.

그는 문장력과 취재력, 대담성을 모두 갖춘 저널리스트였다. 이 셋 중에 하나만 있어도 나름 훌륭한 기자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셋을 다 갖추고도 가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바로 전쟁 보도다. 성공한 종군기자가 되려면 여기에 남다른 사명감과 (생존이라는) 운이 모두 따라야 한다.

팔라치는 베트남 전쟁과 멕시코 학생 시위, 이란 혁명 등 사선의 현장을 넘나들었다. 특히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 자제가 공포였다”고 회고한 베트남에서의 8년은 그가 세계적인 기자로 명성을 떨치는 데 기여했다. ‘북베트남측이 미국 등의 폭격으로 50만명을 잃었다’는 내용의 기사 등 숱한 특종을 쓴다. 부상당해 입원한 병원에서 구술로 기사를 쓸 정도로 사명감이 투철했다.

취재 초기에는 미국의 제국주의에 맞선다며 베트남을 옹호했으나 이후 베트남 비판에 누구 보다 앞장선다. 시간이 지나면서 베트남이 벌이는 야만적인 살육을 목격한 결과다. 베트남과 미국 양쪽에서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이 쇄도한다.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라고 했다. 언론사의 편집방향에 따라 사실상 한 방향의 보도만 지향하는 현 언론 세태를 돌아보게 한다.

물론 팔라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흠결이 많은 편이었다. 자신을 겨냥한 비판을 견디지 못했다. 부정적인 인터뷰나 기사를 보고 ‘기사 일부를 지워달라’고 불같이 항의했다. 한창 활동할 때 동성애자에 대해 “역겹다”고 표현해 물의를 빚었다.

말년에는 이슬람을 힐난하는 칼럼을 써 ‘인종주의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몇 편의 소설을 썼고 기자 보다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 했다. 그의 오만이 낳은 온갖 추문들과 작가로서의 욕심은 그러나 기자로서 지어올린 저널리즘의 성채를 압도하지 못했다.

팔라치는 고등학교 졸업 후 16세의 나이로 이탈리아 피렌체 지역지인 ‘일 마티노 델리탈리아 센트랄레’을 찾아간다. 편집장에게 “리포터(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원래 저널리스트(언론인)가 되고 싶다고 하려 했지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널리스트라는 단어의 무게감 때문에 자신의 꿈을 너무 거창하게 밝히는 것 같아서다.

이탈리아 대표 잡지 ‘에우로페오’, 최대 일간지 '라 리푸블리카',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 등에 기사와 칼럼을 써온 그는 오랜 암 투병 끝에 2006년 9월 7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열렬히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뉴욕타임스는 “과감하게 상대를 해부하는 인터뷰어이자, 우상파괴로 스스로 신화가 된 저널리스트”라고 그를 추모했다.

덧붙이는 말.

몇 개월 뒤 무소불위 같던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팔라치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이번에는 몸싸움을 벌이며 “논란에 대해 해명해달라”고 질문했다.

그와 헤어진 지 30분 정도 뒤 그는 필자에게 전화해 이렇게 말했다. “기자님, 지금이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입니다. 그냥 오늘 안 본 걸로 해주십시오.”  

20세기 가장 위대한 저널리스트를 소개했지만, ‘기자다움’이 무엇인지 아직 확신이 안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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