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행보가 걱정스러워 어디 신혼여행 편히 가겠나.’ 

11일 오후 강남역 8번 출구 앞 삼성 직업병 문제 사회적 해결을 위한 농성장 앞에 현수막이 하나 더 붙었다. 이제 막 결혼식을 마친 두 사람이 농성장에 들어섰다. 반올림 상임 활동가 권영은씨는 이날 이서용진 공인노무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와 결혼식을 치르고 농성장에서 결혼 피로연을 열었다. 

이날은 급격히 온도가 떨어져 쌀쌀한 날이었다. 신랑신부가 폐백이 끝난 후 바로 달려온 농성장에는 설사가상으로 가을비가 내렸다. 현수막 앞에 신랑신부가 나란히 서고 20여명이 주변에 둘러섰다. 반올림 상임활동가들과 함께 일하는 노무사들, 농성을 하고 있는 피해가족들이 참가했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은 7일부터 5일째 24시간 농성 중이다. 

권영은 활동가는 “삼성과 반올림의 조정회의가 무기한 보류된 지금 상황이 심각함을 알리고 싶은 게 우선이었다”며 “피해가족과 활동가들이 농성하는 중에 혼자 신혼여행가서 따뜻한 방에서 잘 생각을 하니 너무 죄스럽다”고 결혼식 피로연을 농성장에서 연 이유를 밝혔다.

   
▲ 11일 결혼식을 올린 반올림 활동가 권영은씨가 '삼성의 행보가 걱정스러워 어디 신혼여행 편히 가겠나'라고 쓰여진 현수막 앞에 신랑과 함께 앉아있다. 사진=정민경 기자.
 

결혼식 피로연까지 농성장에서 보내는 이들의 만남 역시 삼성과 관련된 행사에서 시작됐다. 신랑인 이서용진씨는 작년 연말 처음 권영은 활동가를 만났던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지난 연말 ‘위기의 삼성, 한국 사회의 선택’ 북콘서트에서 처음 만났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둘 다 가수 한영애씨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북콘서트가 아닌 한영애 콘서트를 함께 가자고 이야기가 나왔다. 며칠 후 콘서트 어떻게 됐냐고 문자가 오더라.”

반올림의 농성이 시작된 지 5일째에 결혼식을 시행하다보니 결혼식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했다. 신혼여행 짐도 싸놓지 못했다. 혹시 결혼준비에 소홀한 것에 대해 서운한 생각은 없었느냐고 물으니 이씨는 “이런 비상사태 때문에 소홀히 한다고 해서 섭섭해 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며 “더 절박한 상황이었으면 신혼여행이고 뭐고 못가는 건데 많이 배려해주시니까 감사하게 다녀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빗방울이 굵어져 신랑신부와 참석자들은 농성 천막 안으로 자리를 잡았다. 신혼여행을 떠올리면 어서 자리를 뜨고 싶을 만도 한데 권영은 활동가는 자꾸만 발을 떼지 못했다. 삼성전자와 반올림, 가족대책위가 진행하는 조정회의가 사실상 무제한 보류됐기 때문이다.

   
▲ 7일 조정회의 이후 반올림은 24시간 농성에 들어갔다. 사진=정민경 기자.
 

“7일 있었던 조정회의에서 보상과 관련된 구체적인 이야기를 일주일 뒤 본격적으로 해보자고 제안을 했었거든요. 삼성은 조정기일을 사실상 무제한 보류하면서 이것마저 거부한 거죠. 원래 준비된 것도 못하고 가는 거라 마음이 무겁네요.” 권씨는 말했다. 

이어 권씨는 “피해자 가족들의 상황은 싸움을 시작한 8년 전의 상황과 달라지지 않았다”며 “조정위원회에서 삼성전자 교섭단이 보여준 모습은 피해자들의 경제적 필요를 이용해 개별적으로 합의를 진행하고 사회적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권씨의 지적처럼 조정재개를 위한 길은 멀어 보인다. 7일 삼성은 조정 기일을 사실상 무제한 보류했다. 삼성 측은 “조정회의에서 반올림이 권고안에 대해 너무 많은 수정의견을 제출해 ‘사실상의 거부’라고 보며, 수정의견 가운데 매년 150억 정도의 추가 재원을 요구한 것은 지나친 요구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에 같은 날 반올림은 △수정안을 제안한 것은 7월23일에 조정위원회에서 수정안을 제출하라고 해서 냈던 것이고 이를 ‘거부’라고 표현하는 것은 악의적 왜곡이며 △피해자 규모가 늘어날 경우 공익기금의 추가조성의 필요성에 대해 의견을 낸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관련기사: 삼성 직업병 보상, 수정 요구했더니 거부한 거라고?)

이와 관련해 권영은 활동가는 “반올림이 150억 재원에 대한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수정안에는 제안 형식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교섭단에서 얘기한 적 없는 사안이다”며 “회의에서 언급도 되지 않은 사안을 삼성은 마치 회의 안에서 논란이 된 것처럼 언론플레이를 했다”고 반박했다. 

삼성이 올해 초 이재용 체제로 변환하면서 대대적인 변화를 이뤄낼 것처럼 언론에 비춰졌던 것을 생각하면 반올림과 피해가족들은 더욱 답답해진다. 지금 상황은 고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고 황유미씨의 아버지인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 반올림을 만들었던 8년 전과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 11일 강남역 8번출구 농성장에서 열린 결혼식 피로연 이후 신부 권영은씨가 한혜경씨에게 부케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정민경 기자.
 

이날 피로연에서 신부 권영은 활동가는 보라색 부케를 삼성 LCD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으로 10년째 투병중인 한혜경씨에게 건넸다. 권영은 씨는 “결혼식에서 부케를 줄 때는 부케를 받는 사람에게 행운이 따르기를 기도하는 마음에서 준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삼성 직업병 피해가족들에게 행운이 따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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