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두 건의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중앙일보의 소설가 이문열 인터뷰와 한국일보에 실린 소설가 장정일의 칼럼이다. 이문열은 인터뷰에서 “문단의 표절 논의를 보며 회의감이 들었다”며 “논의 방향이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는 표절에 대해서도 ‘부분 표절’과 전체 표절을 나눠 부분 표절의 무게감을 줄였고, 시인 윤동주도 맹자를 인용했지만 표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며 신경숙에 대한 비판이 과도하다고 주장했다. 

장정일의 칼럼 <문학의 ‘얼룩’>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등장했다. 원래 문학에는 얼룩이 있는데 그 얼룩이란 영향·모방·패러디·인용 등 세분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견 타당한 주장으로 보이지만 결국 논점을 흐리는 주장들이다. 일본 소설이 번역체 그대로 담겨있는 신경숙의 작품이 영감을 받은 것인지 의도적인 표절인지 대중은 알고 있다.

   
▲ 지난 14일자 한국일보 장정일 칼럼.
 

표절에 대한 ‘물타기’는 그간에도 꾸준히 있어왔다. 지난 7월 27일 ‘울산매일’에 실린 박상흠 변호사의 칼럼 <표절의 미학>에서는 표절이 저작권법상 문제가 없다며 옹호했고, 문학평론가 윤지관은 같은달 한국작가회의 게시판에 ‘신경숙을 위한 변론’이라는 글을 통해 ‘다시 쓰기’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신경숙을 옹호하고 나섰다. 소설가 복거일도 같은 달 신경숙이 표절한 게 아니라 게을렀던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권력은 양심상의 이유로 사과하지 않는다. 하지 않으면 기득권을 잃을 것 같을 때만 사과한다. 소설가 박민규가 자신의 작품 두 편에 대해 이달 초에 ‘명백한 도용’이라고 인정한 이유는 “치매 걸린 노모의 병수발을 들어본 적 있냐”며 표절을 부인한 뒤 악화된 여론 탓이 크다. 사과는 하지 않고, 힘드니까 그만해달라는 그의 태도는 “(자신에 대한 비판 글을 보면) 기분만 나빠지고, 뼛속까지 속이 상한다”고 경향신문과 인터뷰한 신경숙의 태도를 연상케 한다. 

   
▲ 지난 7일 국민일보 21면. 소설가 박민규가 자신의 소설에 대한 표절 의혹에 대해 '명백한 도용'이라며 시인했다.
 

신경숙이 표절 ‘지적’이 타당하다면서도 사실상 표절을 인정하지 않자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6월 30일 문학권력 카르텔에 대해 보도했다. 요지는 카르텔의 정점에는 신춘문예와 문학상을 주최하는 언론과 대형출판사가 있고, 출판사가 운영하는 문예지, 거기에서 편집이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작가나 평론가들, 그리고 이런 등단제도를 통과하지 않으면 문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에 대판 비판이었다. 

(관련기사 : ‘글피아’ 카르텔 최정점, 침묵하던 언론의 책임은 없나)

문예창작과에서 고시 공부하듯 심사위원 성향에 맞는 모범답안을 필사해 등단의 문턱을 넘으면 해당 출판사에서 책을 홍보해주고 소속 문예지에서 칭찬해준다. 신문사를 통해 등단한 이 역시 마찬가지다. 문학담당기자가 등단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출판 기사를 쓰는 것 역시 문학 기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카르텔 안에 들어가지 못한 ‘등단 고시생’들은 카르텔 외부에서 문학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깨닫고 문학판을 떠난다. 한 때 문인을 꿈꿨다가 홍보회사, 영화계 심지어 아예 체념하고 법조계로 진출하는 문창과 학생들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소수의견’의 작가 손아람은 ‘한국문단의 구조를 다시 생각한다’ 좌담회에서 “비문학출판사에서도 원고를 검토할 때 필자의 등단 여부를 따지고 신문사가 칼럼니스트를 고를 때 그 사람이 어느 매체로 등단했는지 따진다”며 “이 질서에는 상류와 하류가 있고 상류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작가에게 충분한 보상이 된다”고 지적했다. 

권력은 책임지지 않고 남을 탓한다. ‘표절사태 이후 한국문학’ 대담에서 김영찬은 윤지관을 “생각이 조금 다른 사람”으로 규정하며 “한국문학의 침체원인을 문학권력에 있다고 한데에는 언론의 역할도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문학권력만 해체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이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문학권력의 해체는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이후 문학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그간 떠났던 능력있는 예비작가를 발굴해야 한다. 

작가 손아람도 “등단제도를 입시제도로 본다면 수능을 학력고사로 바꾸는 식의 처방은 아무의미가 없다. 입시를 폐지하고 대학을 보편 교육화하자는 차원의 문제”라고 문학동네 대담에서 문학권력의 실체조차 부인하는 자들을 비판했다.

3대 출판사인 문학동네, 창비, 문학과지성사는 각각 문예지를 운영하고 있다. 출판물로 나오지만 대중에게 완전히 외면당해 대형 서점 구석에 비치된 문예지는 외면당한 한국문학의 현주소라고 할 만하다. 신경숙 표절 이후 각 문예지들은 가을호에서 표절 문제에 대해 다뤘다. 사과는 없었다. 자신들이 곧 ‘한국문학’을 대표한다는듯한 오만함이 묻어나거나 표절을 옹호하는 편집위원의 칼럼뿐이었다. 

창비는 백영서 편집주간이 “표절 논란을 자초하기에 충분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되지만 의도적으로 베껴썼다는 점은 단정할 수 없다”며 신경숙을 적극 방어하고 나섰다. 창비 편집인을 맡고 있는 백낙청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같은 뜻을 밝혔다. 

   
▲ 지난달 29일 서울신문 21면.
 

문학동네는 황당한 논리를 폈다. 문학권력이 문학적인 것을 포기하고 상업성을 추구해왔다고 하는데 문학권력은 대중의 의견을 무시하며 자기들끼리의 문학을 고집하기 때문에 문학권력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문학권력 비판론자 가운데 일부는 표절의 원인이 주례사 비평이라고 하는데 칭찬하는 비평은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으며 이는 ‘달콤한 심판’이라고 말장난에 가까운 주장을 펼쳤다. 

문학권력은 독자를 일정부분 무시해도 되는 상황이다. 실제 소설책이 서점에 깔리는 구조는 이렇다. 카르텔 내부에 있는 작가가 출간하면 관련 문예지에서 열심히 띄운다. 문인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은 작품은 신문사와 출판사 광고를 통해 홍보되고 대형 서점에 깔린다. 독자들은 가판 앞자리를 선점한 작품들 사이에서만 선택하게 된다. 

무료로 볼 수 있는 웹툰이 급격하게 성장하고(2014년 기준 4661 작품), 한국문학을 제외한 텍스트 작품은 불법 유통시장에서 불티나게 거래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문학은 모두가 인정하듯 침체되고 있고 기성 작가들은 민주화 세대의 경험을 아직도 우려먹는다는 비판을 받고 젊은 작가들은 철학이 없이 기교만 있다고 비판받는 상황이다. 

다만 침체되는 문학시장에서 과점권력을 쥐고 있는 3대 출판사는 위기를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마치 신문시장의 위기를 말하지만 조선일보가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독자들은 한국문학을 외면했고,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는 문학권력이 낙후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학권력이 공고한 이유다.

문학과사회는 ‘가을호를 엮으며’에서 표절이나 신경숙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다만 “눈치 빠른 독자들이라면 지난해부터 문학과사회가 큰 변화를 시도해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라며 “비평 정신을 강화해 문학 출판과 문예지 사이의 균형적 거리를 확보했다”고 자화자찬했다. 실천문학에서는 문학기자 좌담을 개최했지만 언론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문학시장을 결정하는 문학권력의 문제 중 하나는 자신이 한국문학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좋은 비평이 한국문학을 바꿀 수 있다는 오만이다. 시인 심보선은 지난 6월 문화연대 토론회에서 “자신의 전문적 역량으로 한국문학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확고한 비평적 믿음을 반성해야 한다”며 비평중심주의를 비판했다.   

문학권력은 자신들이 무매한 대중 위에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문학동네는 강태형 대표를 비롯해 원년 편집위원들이 퇴진했다. 하지만 한겨레에 따르면 문학동네 관계자는 강 대표가 편집이사 직함을 지니고 편집 실무를 맡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바통을 이어받는 2기 편집위원들은 신형철·권희철·차미령 등이다. 

   
▲ 문학동네 2015 가을호.
 

권희철은 앞서 언급한 문학동네 편집위원 칼럼을 쓴 인물이다. 신형철 역시 신경숙 표절에 대해 “다른 좋은 작품의 의미까지 퇴색될까 두렵다”며 애매한 태도를 보였고, 작가들을 모아 진행한 문학동네 대담을 봐도 애매한 그의 태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문학상 제도를 운영하기 위해선 1억원이상의 재정이 들어간다.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곳은 조선일보 등 대형 신문사나 약 200억원 매출을 기록하는 대형 출판사들뿐이다. 문학권력이 사과하지 않는 이유는 위기의 순간에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택했고, 그래도 될 만큼 대중은 문학을 찾기 때문이다. 

출판사 ‘자음과 모음’이나 국민일보 등에서 문학상을 추진하다 실패하거나 적자를 감내하고 유지하는 이유는 장기적으로 이 문학권력 카르텔 안에 진입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판단에서가 아닐까.  

대안은 문학권력이 무시하고 있는 대중의 선택뿐이다. 등단하지 않았지만 영화계에서 인정받아 유명해진 손아람 작가는 올해 말부터 제도권 비평에 대한 메타 심사하는 ‘메타문학상’을 운영할 예정이다. 격월간 독립문예잡지 ‘더멀리’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창간했다. 이들은 등단 유무를 따지지 않는다. 독립 문학 공동체를 추구하는 ‘문학실험실’이라는 단체도 만들어졌다. 이처럼 문학권력에 복무하지 않는 작가들의 움직임은 표절 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다. 권력은 자신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을 두려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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