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침략과 압제로부터 해방된지 70년을 맞아 1920~30년대 조선 청년들의 폭탄 의거에 대해 당시 언론이 어떻게 보도했는지 재조명이 되고 있다.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 투척을 나석주 의사의 의거, 일본 천황 차량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의 의거, 상하이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 등은 광복 70년 뿐 아니라 최근 영화 <암살>의 흥행과 함께 다시금 큰 관심을 얻고 있다. 그러나 당시 대표적인 언론이었던 조선일보의 경우 이들의 의거를 불경사건 또는 범인 등으로 표기하는가 하면 ‘불안’ ‘유감 천만’ 등 일본 당국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는데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1926년 12월 28일 조선 민족의 경제적 약탈과 침략을 일삼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 투척을 시도하고 직원 7~8명을 사살한 이른바 나석주 폭탄 의거에 대해 조선일보는 그 이듬해 1월 14일자에서 이 소식을 전했다.

조선일보는 당시 기사 <재령북율면출생 라석주/동척, 신은습격사건 전말/게재 금지중 13일 오전 11시 발표>에서 나 의사에 대해 “9년 22일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상해 북경 천진등지에서 조선OO단과 행동을 같이하다가 작년 1월에 동지들과 함께 북경에서 중국인 부호를 습격키로 협의하얐던 일도 있어 가사를 돌아보지 아니하야 자기 부친에게서 질책하는 통신을 받은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조선은 이어 “범인은 중국 고력으로 변장한 후 거짓이름으로 중국 지부에 있는 리통윤선공사의 소유 기선 리통환에 탑승하고 12월 26일에 인천에 상륙하야 동지 중국인력관 원화잔에서 저녁밥을 먹고 그날 밤에 진남포로 간다고 일컷고 그곳에서 나와 하인천을 떠났다”고 설명했다. 이후 12월 28일 벌어진 사건을 이렇게 기술했다.

“‘식은과 동척을 습격’. 27일 아침 경성에 잠입한 라석주는 시내 남대문 밖 동춘잔에 투숙하고 그 이튿날 되는 28일 오후 1경에 전기 동춘잔을 나와 동 2시 전에 동척지점에 이르러 리영우라는 사람이 있고없음을 물어 그 사람이 없다는 것을 듣자 식산은행에 이르러 동 은행 영업과 대부계실에 폭탄 한개를 투척하였으나 그것이 파열되지 않았으므로 즉시 현장으로부터 자취를 감춰 다시 동척지점원 고목길강에게 권총을 란사하야 고목에게 부상을 부상을 시키고 즉시 2증으로 올라가서 토지개량과 기술실 부근에서 릉천 기사장과 대삼 사원을 사격 부상시키고 다시 이웃방이 되는 토지개량과에 폭탄 한개를 또 던졌으나 그것도 역시 폭발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범인은 계하로 뛰어내려와 때마침 아래층에 있던 무지 동척 사원과 조선철도회사(동척지점에 사무소를 두었다) 송본수위와 용산에 있는 천진당 시계점원 목촌열조의 세명에게 역시 권총을 란사하야 부상시키는 일방 현장으로부터 달아나 황금정 이정목 전차동까지 닥쳤을 제 때 마츰 동척 앞을 지나가다 총성을 듣고 달려온 경기도 경찰부 근무 전전 경부보와 다닥치게 되여 동부보를 란사하야 경부보와 이 급보를 듣고 급행한 본청 경찰서 근무의 횡전 경부보와 야정 청목 고천 당봉 박용하의 각 순사가 급히 추척하야 피치못할 줄을 자각한 모양으로 자기가 가졌던 권총으로 자기의 가슴을 세번이나 쏘아 자살을 도모하였다.”

조선은 시종일관 나석주 의사를 ‘범인’으로 표기했다. 사진설명에서도 조선은 “(상)사건발생찰나의 척식회사앞 (중)잡잡한 황금정 네거리의 군중 (하)범인 라석주”라고 썼다.

“중경상을 당한 피해자와 범인을 즉시 총독부 의원과 식촌병원에 수용하고”
“범인도 역시 동일 오후 4시20분에 총독부 의원에서 절명하얏는데…”
“범인의 시체는 동월 31일에 라석주의 장남 라응섭과 라석주의 당질 라응률에게…인도하였다”

약 5년 여가 흐른 뒤 동경에서 발생한 이봉창 의사의 일본 천황 폭탄 투척 사건에 대해 조선은 아예 ‘불경사건’이라고 표기하는가 하면 천황에 대해서는 기사구절마다 극존칭을 썼다.

   
조선일보 1932년 1월 10일자 2면. 이봉창 의사를 '범인'으로 표기.
 

조선은 1932년 1월 10일자 2면 <천황 陛하 황행송중 로부에 폭탄 투척/8일오전 동경 경시 청전 어표차 별무이상>에서 “내무성 발표 천황폐하께옵서 육군시판병식에 행행하옵섰다가 황행하옵시는 도풍로부가 앵전문(櫻田門)으로 지날 즈음에 어경위 사고가 발생하였섰는데 그 사건개요는 아래와 갓다”며 다음과 같이 전했다.

“8일 오전 11시 40분경 로부다 국정 구앵전정 경시청 앞거리 모퉁이로 꺾어돌아갈 때 봉배자선내에서 돌연 어로차로부터 앞으로 약 18간 되는 로부의 둘째차 궁내대신이란 차에 수류탄 같은 것을 던지었다. 동 대신 승용차 왼편 뒷차륜부근에 떨어져 동차체의 밑으로 엄지손 간큼과 손 뒷곳이 두세곳 있었으나 어로차 기타에는 어이상이 없이 오전 11시50분 무사히 궁성에 환어하옵시었다.”

이봉창 의사에 대해 조선은 <범인은 동성출생이봉창/현장에서 즉시 체포>에서 “범인은 경시청 석삼순사 외현병 등이 곧 현장에서 체포하여 경시청으로 인치하고 취조한 결과 범인은 경성 출생의 일명 조산창일 리봉창(32)으로 판명되였다”고 썼다. 

특히 조선은 이 사건을 ‘불경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조선은 <증전철도역부/7년전 출향/그간 부모도 다 죽어버리고 그 형은 천진에 거주>에서 “9일 오전 11시5분 OO사건에 관하야 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아래와같이 발표한바 있다”며 “작일 동경에서 있은 불경사건(不敬事件) 범인 리봉창의 신원에 대하여 지금까지 판명된 상황의 대요는 아래와 같다”고 보도했다.

무엇보다 조선은 상하이 홍코우 공원의 도시락 폭탄 의거의 주인공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는 1면과 2면을 할애하며 각지의 반응까지 싣는 등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조선은 이 사건을 “불상사”, “대불안”, “중국 무책임”, “범인에 조선인 유감천만” 등의 표현을 곳곳에 넣었다.

   
조선일보 1932년 5월 1일자 2면. 부제에 '범인 윤봉길'로 쓰인 대목이 보인다.
 

조선일보는 1932년 5월1일자 2면에 <상해 축하식상에서 조선청년이 폭탄 투척(投擲)/중광공사, 백천대장 등 중상/범인은 예산의 윤봉길>라는 기사를 실은데 이어 3면에는 <상해폭탄사건의 파문/순풍이 든 정전회의 부득이 기 연기호(乎)/대부서는 중국 무책임을 언명> 등을 실었다.

또한 조선은 같은 지면에 <상해폭탄사건 연맹에서 경악/범인 조선인으로 중국 무책임 타고/
중국대표부는 주장> 등도 게재했다. 조선은 <폭탄사건 발발로/임시계엄령 발포/북사천로 신공원 일대간에 거류민은 대불안> 기사에서는 “폭탄사건 발발과 동시에 북사천로로부터 공원 일대에 향하야 임시 계엄령이 발포되여 처참한 광경을 정(呈)하고 있다”며 “불상사가 시중에 널리 알리움으로부터 거류민은 불안에 OO되야 이곳저곳에 집합하야 대책을 강(講)하는 등 불온한 공기는 상해 전일본 거류민을 OO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이 신문은 <상해폭탄사건에 대한 각 방면의 담화/여사한 불상사 사건은 유감막심한 일/총영사관 당국 담>, <범인에 조선인 있었음은 더욱더 유감 천만 우항총독 담/상해 폭탄 사건의 상황을 가지고 우항 총독부 관부> 등 윤 의사의 의거를 유감스러운 불상사로 주장한 일본 당국자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1932년 5월 1일자 1면.
 
   
조선일보 1932년 5월 1일자 1면. '범인에 조선인 있었음은 더욱 유감천만'
 

이를 두고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삼웅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는 12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조선일보가 주장해온 것처럼 ‘조선 민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상세히 홍보용으로 썼다’고 보기 보다는 일본이라는 침략국 요인 집단의 파괴를 위해 조선인의 범죄로 보도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했다는 것은 왜곡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는 “(적어도 당시 어쩔 수 없이 보도했던 것이라면) 해방 후에 그런 부분에 대한 사과나 사죄라도 했어야 하나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며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현 서울신문)의 직원들은 사죄성명을 냈으나 조선 동아는 자신들의 친일 반민족 행위에 대해 사과 사죄를 한 적이 없다”고 비판했다.

김 대표는 해방(광복) 70년을 맞아 “친일 언론들이 자신들의 죄상을 올려놓고 분단정권과 군사정권 기생해 살아왔는데 일제 독재 부역행위에 대해서는 큰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며 “친일 족벌언론 종사자들은 그런 통절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관계자는 14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당시는 일제의 혹독한 신문검열을 통과하지않으면 신문 자체가 발행이 되지않는 불행한 시대였다”며 “그런 시대상황 속에서 (위에 제시한) 각종 의사들의 의거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보도를 통해 조선 민중에게 알려졌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당시 일제 감시하의 위험을 무릅쓴 보도는 독자들에게 독립운동 소식을 상세히 알리면서 애국심을 고취한 항일의 성격을 띠고 있는 면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앞서 조선일보는 1923년 발생한 김상옥 의사의 종로서 폭탄 및 총격전 의거를 ‘범인’, ‘경성 혼동’ 등으로 표기한 것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미디어오늘에 밝혔다.

   
이봉창 의사. 사진=이봉창의사 기념사업회
 

 

   
윤봉길 의사. 사진=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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