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헌법에서 연좌제를 금지하고 있다. 연좌제는 자신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형사책임을 지는 것이다. 친일후손이 언급이라도 되면 바로 따라붙는 얘기가 연좌제다. 친일파에 대한 형사책임조차 묻지 못한 나라에서 친일후손들에 대한 형사책임이 언제 나왔던가? 친일파를 비판하는 국민들까지 친일후손에 대한 언급을 연좌제와 연결하는 경우가 많다. 친일역사 청산이 어려워지고 있다.  

일본제국이 한반도에서 물러난 1945년 8월로부터 70년이나 흘렀다. 한 세대(30년)란 세상이 바뀌는 시간이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이후 열심히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저항하던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1940년 이후 변절했다. 신념마저 꺾어버리는 30년이  두 번 지나고도 강산이 한 번 더 변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열렸을 때 친일파들은 체념했다.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의원이 된 자,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해친 자는 최고 무기징역 최하 5년 이상의 징역,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재산몰수에 처해야 했지만 반민특위는 무산됐다.

반성하지 않아도 떵떵거릴 수 있고, 혹시 모를 후환까지 대비하도록 허용된 시간이 70년. 친일세력이 부활했다. 친일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세력은 청와대와 집권당 뿐 아니라 이 사회의 핵심 요직을 장악하고 있다. 뉴스타파는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은 친일파 후손의 명단을 작성하고 친일 재산환수를 거부하는 이들을 추적한 돋보이는 기획이었다.

▲ 사진=뉴스타파 '친일과 망각'화면 갈무리
▲ 사진=뉴스타파 '친일과 망각'화면 갈무리


뉴스타파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확정 발표한 친일파 1006명의 후손을 조사해 1177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3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식민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에 협력한 이들은 많았다. 친일역사를 덮으려는 사람들은 친일의 범위를 지나치게 넓혀 친일의 의미를 희석시킨다. “그렇게 따지면 일제 강점기 중산층 이상은 다 친일 아니냐”는 식이다. 하지만 친일파 1006명은 친일 여부가 애매한 사람을 제외하고 확실한 사람들로만 선정해 최소치에 불과하다. 

친일파는 다 죽었다. 그들의 재산은 후손들이 누리고 있다. 한국 사회가 노동보다는 자본이 자본을 낳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이 입증된 자본주의 사회라는 점에서 친일 후손들은 선조의 친일로 혜택을 보고있다. 뉴스타파 취재결과 친일 후손의 376명(32%)은 이건희 회장 일가와 같은 기업임원이었다. 그 외에도 법조인·정치인·언론인 등 파워엘리트 그룹은 163명(14%)이고 대학교수(191명)나 의사(147명)도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친일 후손의 거주지는 43%가 강남 3구이다. 한남동, 성북동, 평창동 등 단독주택에 사는 부자들이나 신도시인 경기도 분당에 사는 사람도 많았다. 친일파가 축적한 부동산은 4억3000만㎡로 추정된다. 그 중 국가에 귀속된 땅은 0.3%인 2181만㎡밖에 되지 않는다. 70년의 시간은 친일 재산 환수조차 어렵도록 만들었다.

그간 기득권은 교육을 통해 세습됐다. 친일후손 1177명 중 3분의 1이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 출신이고 27%는 유학 경험이 있었다. 교육이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에서 두 세대동안 친일후손들은 친일로 얻은 재산을 자녀교육에 투자했다. 2000년대 친일 청산 작업 때는 친일 후손들의 국적포기가 급증했다는 것 역시 친일의 유산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 뉴스타파 취재결과 친일파 35개 가문이 20건의 혼맥으로 서로 연결돼 있다. 친일파 방응모의 증손자인 방상훈 전 조선일보 사장은 또다른 친일파 윤치호의 증손녀와 결혼했다. 사진=뉴스타파 '친일과 망각'화면 갈무리
 

친일 재산 환수는 개인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벌어들인 돈을 부모가 친일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빼앗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막대한 재산을 통해 충분한 권세를 누려온 친일후손들이 다 빼돌리지 못한 재산을 뒤늦게라도 정당한 위치에 돌려놓자는 것이다. 부당하게 이득을 누려온 것을 멈추자는 것이지 누군가의 정당한 재산을 강탈하자는 것이 아니다. 

한 예로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징병제를 칭송했고 징병과 학병을 권유해 친일파로 분류됐다. 친일파 재산환수 소송에서 대부분 친일파들은 재산을 다시 국가에 환수하도록 판결이 났지만 김성수 후손의 소송은 6년째 진행 중이다. 1심에서 국가가 이겼지만 2심은 4년째 계류 중이다. 해당 판사만 6명이 바뀌었다. 친일을 통해 절대 권력이 된 자에게는 정당한 법 집행조차 부담스러운 것이다. 김성수의 후손들은 그의 친일행위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친일 후손들이 친일 행위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친일파 후손’ 자체가 한국사회에서 낙인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연좌제다. 원인은 친일파 단죄나 친일재산 환수가 되지 않아서다. 그들은 친일 이득을 이용해 부당한 권력을 누려왔다. 혹 친일 재산을 반납하고 선조의 친일행적에 반대했던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 한국사회는 해당 친일 후손을 너그럽게 바라볼 수 없지 않은가? 

친일이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단죄는 사회적 비난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에 대한 분노가 풀리지 않은 채 쌓여있고 법의 영역 밖에서 오히려 연좌제가 적용된다. 사실 친일 재산 환수는 연좌제를 금지하고 있는 헌법 가치에 부합하는 조치다. 지난 2011년 3월 헌법재판소는 친일재산 국가 환수를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친일 후손들의 혜택을 추려낼 방법도 없다. 영화 ‘암살’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기억하는 것 밖에 없다. 친일파를 기억하고 그런 과거를 옹호하는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들과 맞서 일제의 폭압에 저항했던 이들을 기억하는 게 전부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