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친일파와 일제 고관대작 처단의 삶을 그린 영화 <암살>이 큰 반향을 낳으면서 영화 속 배경의 하나로 알려진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의거 및 최초의 시가전에 대한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기사가 새삼 재조명되고 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김상옥 의사의 의거에 대해 거사 이후 상세하게 보도했으나 사건 직후엔 김 의사의 실명을 가린채 ‘범인’(동아, 조선), ‘중대범인’(조선) 등으로 표현하다가 일제 당국의 발표 이후에야 ‘김상옥’이라는 이름과 함께 범인이라고 썼다. 조선일보는 거사 2~3년 전엔 ‘암살단 수령’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으로 나와있다. 특히 1923년 1월 12~1월 22일 폭탄 투척과 두차례 총격전이 있을 무렵 조선일보 기자는 김상옥이 거사를 벌인 일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사건 1년 뒤 취재후기에서 밝히기도 했다. 일제 당국이 수사결과 발표 전까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김상옥 의사를 ‘범인’으로 썼다.

당시 언론보도와 김상옥 의사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김상옥 의사는 상해에서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일제 탄압의 본산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뒤 총독처단 거사를 위해 삼판통(현 후암동-남산 중턱)에서 은신하던 중 1월 17일 포위 기습한 일경과 총격전을 벌여 순사들을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김상옥 의사는 대설이 쌓인 남산을 맨발로 종주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은신처인 효제동 이혜수 동지의 집에 은거하다 1월 22일 거처가 발각돼 대규모로 근접 포위한 일경 500여 명(1000명이라는 기록도 있음)에 맞서 약 3시간 여 동안의 총격전을 벌이다 최후를 맞았다. 마지막 총격전에서 16명 이상의 일경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최근 흥행중인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 전지현(안옥윤 역할)이 서소문 시내에서 지붕위를 넘나들며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도 김상옥 선생의 의거 과정을 모티브로 삼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사건은 당시 일제 치하에 충격을 줬으며, 김상옥 선생에 대해서는 사격과 변장, 잠적에 출중한 명수로 일본 군경의 추격을 따돌린 ‘동대문 철물점의 홍길동’이라는 구전이 전국으로 확산됐다고 ‘김상옥 의사 기념사업회’는 전했다.

   
조선일보 1923년 1월 14일자 3면. 사진=김상옥 의사 기념사업회
 

이에 따라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하면서 상세하게 상황을 전했으나 김상옥 선생을 ‘신출귀몰하는 범인’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조선일보는 1923년 1월 23일자 3면 머리기사 <순사총살 범인과 수색대가 두시간 여의 대격전/작일 효 두시 내 효제동에서/율전 경부는 중상하고 모처 범인은 급히 즉사>에서 전날 아침 총격전과 김상옥 의사의 최후를 이렇게 기술했다.

“지난 17일 새벽에 시내 모처에서 경관의 포위를 벗어나서 범인은 그 후 남산을 넘어서 왕십리 방면으로 가다가 어뎨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서 경관은 극력수색중이던 바 그는 교묘하게 변장을 하고 다시 시내로 들어와 효제동 OOO번디에 잠복하야 잇는 것을 탐지하고 22일 아침 7시반에 동소를 포위하고 수색한 바 그는 교묘히 은신하야가지고 반항함으로 경관은 재삼 항복하기를 요구하얏으나 도모지 응치 아니하고 두 손에다가 육혈포를 하나씩 쥐고 함부로 놓다가 마침내 권총을 손에 주인채로 즉사 하얏다더라”

이밖에도 조선일보는 김상옥 선생에 대해 1월 19일자, 20일자에서도 모두 ‘범인’이라고 표현했다. 조선은 1월 23일자 당시 광경을 묘사한 기사 <순사는 사면으로 에워싸서 있고 총소리는 좌우에서 콩복듯 하다>에서는 ‘중대 범인’이라고도 썼다.

이 같은 김상옥에 대한 ‘범인’ 또는 ‘중대 범인’ 표기는 동아일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김상옥에 대한 이름을 등장시킨 것은 일본이 사건 발표와 보도금지를 해제한 그해 3월 15일 이후였다. 조선일보는 3월 16일자 3면에 “김상옥의 사건은 자세히 아는 바이나 보도의 자유가 없는 조선의 신문이라 검사의 손이 끝난 오늘에야 겨우 발표되게 되얏기로 보도하노라”라고 썼다.

   
조선일보 1923년 1월 19일자 3면. 사진=김상옥 의사 기념사업회
 

특히 조선 이날 기사에서는 김상옥 선생의 폭탄 의거에 대해 평온한 경성이 흉흉해졌다고 평가하는가 하면, ‘경성을 혼동했다’고 비하하는 표현도 보인다. 조선은 3월 16일자 기사에서 “1월 12일 오후 8시40분 경에 시내 종로경찰서에다가 돌연히 폭탄을 던져서 평온한 듯한 경성은 다시금 흉흉하게 되고”라고 평가했으며, 김상옥 선생의 사진 설명에 “일월내 경성을 혼동한 주인공 김상옥”이라고 소개했다.

조선과 동아는 이 때 기사에서도 김 선생을 ‘범인’으로 표기했다.

석간이라 조선일보 보다 하루 전날 발행된 동아일보는 그해 3월 15일자 3면 기사에서 김상옥 선생 의거에 대해 “1월 17일 새벽에 시내 삼판통에서 전촌형사를 총살하고 그 달 22일에 시내 효제동에서 순사대의 총을 마저 죽은 사건의 범인은 경성부 창신동 487번지에서 철물상을 하든 김상옥”이라고 썼다. 1월 17일 삼판통 총격사건에 대해 동아는 중대범인이라고도 썼다.

“김상옥을 잃은 형사는 즉시 호각을 불어 중대범인을 놓친 경호를 자조하며 즉시 각 경찰서 정복 순사 1000여 명을 풀어 그가 도망한 남산을 나는 새도 빠지지 못하게 에워싸고 눈쌓인 남산 전부를 수색하고 일변 수백명 경관은 왕십리 일대와 광희정 일대를 수색하며 기마 순사가 총검을 번쩍이며 삼판통 일대를 경계하니 실로 금시에 경성 시내 일대는 전시상태와 같이 되엿으며 일면 김상옥의 누이와 고봉근과 그 친족까지 정부 경기도 경찰부로 인치하얏더라”

다만 조선과 동아의 기사에는 김상옥 선생의 활약상을 평가한 대목도 있다. “최후 일각가지 교전타가 오명의 사상을 내이고 몸을 맛치어”(조선일보 3월 16일자 부제목) “경관은 항복하기를 바랏으나 범인은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고 서로 총알을 난호다가 마침내 참사하게 되얐다더라”(같은 기사).

   
조선일보 1923년 3월 16일자 3면. 사진=김상옥 의사 기념사업회
 

이와 관련해 일제의 보도자유 통제와 검열이 있었다 해도 일제 당국이 발표하기 전까지 두달 동안 김상옥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은 이유는 나와있지 않았다. 이미 조선일보는 김상옥을 암살단 수령이라고 소개한 기사를 2~3년 전에 게재했었다. 조선은 거사 3년 전인 1920년 8월 26일자 3면 기사 <암살단 체포>에서 “이미 미국의원단 입경을 즈음하야 불온한 활동이 있음으로부터 당국에서 미리 주의하야 오던 바 동대문 밖 사는 김상옥은 심히 위험한 사람으로부터 24일 오전 10시30분 체포에 향하랴 하얐으나 경관의 수효가 부족함으로 인하야 그 사람은 교묘히 지붕위로 뛰어넘어 어디로 도망하얏고, 그런 류자의 한 사람이 되는 '한군'을 체포하얐는데 그 사람은 가장신식의 육혈포와 불온문서를 가졌더라”라고 보도했다.

또한 사건 1년 후인 1924년 1월 1일자 조선일보엔 김상옥 사건을 취재했다는 최광파 기자가 쓴 취재후기에도 사건 당시 김상옥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최 기자는 <인상깊은 과거 1년간 신문기자 생활의 이면>이라는 글에서 “그후 6일째 되든 1월 22일  아침이었다”며 “아직 금침(이부자리) 속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누가와서 ‘김상옥군이 체포됐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투중’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썼다. 그는 “이 소리를 들은 나는 의복도 되는 대로 입고 인력거를 몰아 1분이 석급하게 현장에 당도하였다”고 전했다.

최 기자는 당시의 무력감을 일부 전하기도 했다. 

“김군은 이미 총알의 불귀객이 되고 만 때이었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과 머리에서는 아직도 더운 피가 흘러서 얼음 위에 큼직큼직한 물을 들일 뿐이었다. 나의 몸에는 아무 느낌없이 오직 소름이 뚝깃치고 가슴이 알 수 없이 떨릴 뿐이었다. 곧 돌아와 제3차 호외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자유없는 그붓, 제한아래에서 기록하든 그 붓씨에 무슨 관이 있으며 무슨 가치있는 티가 나왔으며, 오직 궁금한 독자에게 이러하구랴 할 뿐이었었다”

이를 두고 일제 치하에서 발행한 신문이라 해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김상옥 선생을 범인 취급한 것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 해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상옥 선생의 의거는 해방된 이후에도 15년 동안이나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급)이 추서된 것은 1962년 3월 1일이었다.

   
조선일보 1920년 8월 26일자 3면. 사진=김상옥 의사 기념사업회
 

정일용 6·15 남측위원회 언론본부 상임공동대표는 7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민족지라고 주장하면서 과연 일제 압제에 맞서 제 역할을 했는가”라며 “민족지를 내세운다는 건 이 나라의 광복을 위해 앞장서 싸웠다는 뜻일텐데, 이렇게 보도한 것에 대해 반성과 사과도 하지 않은 채 민족지를 내세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백영찬 김상옥 의사 기념사업회 총무이사도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이 보도는 그 당시 우리 언론이 일제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쓴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며 “일제의 핍박 때문에 보도 역시 제대로 못했을 것이지만, 불쌍한 나라와 민족이 됐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 관계자는 6일 미디어오늘과 이메일 인터뷰에서 “당시는 일제의 혹독한 신문검열을 통과하지않으면 신문 자체가 발행이 되지않는 불행한 시대였다”며 “그런 시대상황 속에서 김상옥 의거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보도를 통해 조선 민중에게 알려졌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당시 일제 감시하의 위험을 무릅쓴 보도는 독자들에게 독립운동 소식을 상세히 알리면서 애국심을 고취한 항일의 성격을 띠고 있는 면이 있었다”며 “실제 1923년 3월 16일자 3면엔 김상옥 추도대회를 보도하며 ‘이력을 슬픈 말소리로 설명할 때에 듣는 사람은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고 썼다”고 덧붙였다.

   
서울 동숭동에 세워진 김상옥 의사의 동상. 사진=조현호 기자 ch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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