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는 이 땅에 뿌리를 깊숙이 내렸다. 말글살이부터 나타난다. 같은 대상에 순우리말은 쌍스럽고 한자어나 영어가 점잖다는 보기는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 사대적 체면으로 정작 살아있는 현실을 놓치기 일쑤다. 가령 얼마 전 큰 충격을 준 ‘인분교수’만 보아도 그렇다. 교수가 제자에게 ‘벌’로 똥을 먹인 엽기적 사건은 대학에서 교수의 갑질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언론은 그를 ‘인분교수’로 명명했지만, ‘똥질교수’가 진실을 더 담아내는 민중적 표현 아닐까.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말도 그렇다. 신문과 방송은 교황이 ‘물신숭배’를 ‘악마의 배설물’이라 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물신숭배’도, ‘배설물’도 교황의 뜻을 온새미로 옮긴 말은 아니다. 교황은 “돈을 자유롭게 좇는 일”은 “악마의 똥”이라고 말했다. 자유롭게, 속박 없이 돈을 좇는 전형은 ‘신자유주의’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는 교황의 소신과 이어진다.

똥을 인분이나 배설물로 써야 ‘저널리즘’은 아니다. 똥과 인분, 배설물의 차이는 순우리말 여부일 뿐, 저널리즘의 질은 내용에 있다. 황금만능주의나 신자유주의, 새로운 독재를 줄기차게 비판하는 교황의 공언을 묵살하는 저널리즘은 아무리 똥을 배설물이나 인분, 그 이상으로 써도 ‘악마의 똥’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한국 언론은 악마의 똥을 좇는 신자유주의자들을 감시해야 마땅함에도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 당장 권력자들이 ‘노동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으름장 놓는 행태를 보라. 정보기관의 대선개입으로 정당성이 흔들리는 박근혜 정권이 ‘노동개혁’을 선포하고 나서자 여론시장을 독과점한 신문권력과 권력방송은 용춤 추고 나섰다. 대체 무엇이 ‘노동개혁’인가를 묻는 언론은 드물다. 쿠데타 원흉이 자신을 ‘혁명가’로 버젓이 주장하는 행태와 어금버금하게 언론은 권력의 언어를 그대로 베껴 쓴다.

박근혜가 북을 치고 김무성이 장구 치며 집권세력이 다걸기에 나선 ‘노동개혁’은 과연 ‘개혁’이라는 이름에 값하는가? 한 사안들 두고 집권당은 개혁, 야당은 개악이라 주장할 때, 언론은 개혁과 개악의 논리를 공평히 보도해야 옳다. 하지만 과연 그 상식을 실천하는 신문사와 방송사는 얼마나 되는가.

‘개혁’과 ‘개악’ 양자의 공평 보도에서 더 나아가 시시비비도 가려야 옳다. 집권세력은 비정규직 확산이 ‘정규직 과보호’ 탓이라며 임금 및 고용에 양보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저들의 논리에 자본의 탐욕은 전혀 ‘변수’가 아니다. 자본이야말로 사내유보금 따위로 곳간이 넘쳐 썩어가는 데도 그렇다. 만일 저들의 주장대로 ‘개혁’될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자명하다. 보편적 노동조건이 악화됨으로써 노동자 해고가 더 ‘자유’롭게 되고 의도와 달리, 또는 의도대로 비정규직 고용이 되레 늘어나며 자본은 무장 살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치공세’가 아니다. 과학이다. 여북하면 한국노총조차 대화 자리를 박차고 나왔겠는가.

   
▲ 박근혜 대통령이 2월24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화체육 활성화를 위한 기업인 오찬'에서 행사장에 입장해 착석하고 있다. 이 자리에는 박용현 한국메세나협회장, 구본무 LG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등이 참석했다. ⓒ 연합뉴스
 

비정규직과 국민을 홀리며 정규직 노동자에 ‘선전포고’를 한 대통령의 살천스런 얼굴은 재벌 회장들 앞에선 사뭇 달랐다. 청와대로 불러 대접한 식탁에 한우 안심, 농어구이, 전복구이, 훈제연어들이 줄을 이었다. 호사스런 밥을 먹기 전에는 개그맨 공연까지 곁들였다. 대통령과 재벌회장들은 화기애애하게 ‘오찬’을 즐겼다는 보도에선 하릴없이 분노가 치민다. 박근혜가 낸 향기 넘친 밥값은 어디서 나왔을까. 다름 아닌 국민, 그 대다수인 노동자들이 낸 세금이다. 혈세로 재벌들 불러 한우에 농어, 연어, 전복을 먹이는 대통령은 노동자들에겐 쌍심지를 켜고 있다.

명백히 재벌을 대변하는 정권임에도 입만 열면 ‘국민’을 들먹이는 저 위선을 드러내야 할 직무가 언론에 있다. “우리 아들과 딸들을 위해”, “비정규직을 위해”, “절망에 잠기 청년세대”를 위해 “반드시 노동개혁”을 하겠다는 사기극의 진실을 보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완장을 차고 덤벼대는 ‘언론인’의 죄악은 두고두고 기록으로 남을 게 틀림없다. 그 기자의 이름이 남을 것도 분명하다. 비단 신문권력의 사주나 권력방송의 하수인들만 역사의 문책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밥 먹는 향기 나는 식탁에 가득한 ‘악마의 똥’들을 제발 그만 받아먹길 권한다. 똥질의 결과는 부메랑이다. 최근 조중동의 한 신문사에서 평생을 바쳤지만 돌연 대기발령 난 50대 현직 언론인이 자살한 사건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더 개악하겠다는 저 ‘악마의 똥’들을 향기로 포장하지 말고 썩은 구린내 그대로 독자와 시청자에게 알려가야 옳다. 그것은 무슨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명색이 언론인으로 밥 먹고 살아갈 최소한의 의무요,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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