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고도의 언론 플레이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해킹 전담 직원인 임아무개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음날인 19일 오후 국정원은 국정원 직원 일동 명의로 작성된 “동료를 직원을 보내며”라는 글을 공개하면서 “정치권의 근거 없는 의혹이 젊고 유능하고 책임감이 강한 국정원 직원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 실체 불명의 직원 일동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국정원의 입장이라고 봐도 무방한 글이다. 

이에 앞서 국정원이 17일 오후 발표한 “해킹 프로그램 논란 관련 국정원 입장”이라는 보도자료에서는 임씨를 지칭하는 듯 “담당하는 국정원 직원은 그 분야의 최고 기술자일 뿐”이고 “어떻게 하면 북한에 관해 하나라도 더 얻어낼 수 있을가 매일처럼 연구하고 고뇌한다”면서 “이들의 노력을 함부로 폄하해서도 안 되고 더구나 국정원이 지켜야 하는 국민을 감시하는 ‘사악한 감시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이탈리아 해킹팀.
 

임씨는 지난 14일 국회 정보위원회가 열린 날 해킹 사태 책임을 지고 특별감찰을 받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대외적으로는 임씨를 두둔하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임씨의 비위를 캐는 상황에서 임씨 입장에서는 조직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국가기관의 범죄행위가 개인적 일탈로 결론난 사례가 한두 건이 아니라는 사실도 압박감을 가중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임씨는 유서에서 “문제가 될 만한 자료를 삭제했다”고 밝혔는데 자칫 배신자로 내몰릴 상황에서 명예를 지키는 최후의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정원은 직원 일동 명의의 글에서 “순수하고 유능한 사이버 기술자였던 그가 졸지에 우리 국민을 사찰한 감시자로 내몰린 상황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임씨가 자료를 삭제했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 “국정원의 공작 내용이 노출될 것을 걱정했던 보인다”면서 “그래서 자의대로 이를 삭제하고 그 책임을 자기가 안고 가겠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 것도 이런 추측에 힘을 실어준다. 

   
▲ 20일자 조선일보 3면 보도.
 

국정원의 발표는 언론에 의해 확대 재생산됐다. 언론은 임씨의 신상을 공개하면서 그가 ‘국가관이 투철한 직원’이었으며 ‘기술 전문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임씨는 전북 출신이며 지방 국립대에서 전산학을 전공한 뒤 국정원에 들어와 20년간 사이버 안보분야에서 근무했다. 조선일보는 임씨의 큰딸이 현재 육군사관학교에 재학 중이라며 국가관이 투철한 직원이라는 사실도 강조했다. 

문화일보는 이수정 경기대 교수와 인터뷰를 통해 “국정원의 주요 의사결정 라인에 있거나 공작 요원도 아닌 프로그래머가 극단적 선택을 한 까닭은 조직에 대한 과인식이나 과잉충성이 일부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주요 의사결정 라인에 있거나 공작 요원도 아닌 전문 기술자를 특정한 뒤 개인적 일탈로 꼬리자르기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국정원이 직원 일동의 입장 발표에서 “매일 근거없는 의혹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불만을 털어놓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 20일자 문화일보 5면 보도.
 

국정원의 언론 플레이는 내부의 희생양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꼬리자르기 전략일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이 사건을 여야의 정치적 공방과 언론의 무리한 추측 보도로 규정한 뒤 국회 조사단의 현장 방문 이후 증거 불충분으로 적당히 덮는 시나리오의 사전 작업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국정원이 임씨의 과잉충성과 개인적 일탈로 결론을 내릴 경우 오히려 국정원의 발목을 잡게 될 가능성이 크다. 임씨의 유서와 국정원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국정원은 특별감찰 대상자인 임씨가 논란이 되고 있는 자료를 삭제할 때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임씨가 죽고 난 뒤 국정원은 부랴부랴 “무엇을 삭제했는지 복구 작업 중”이라고 둘러댔는데 일련의 상황을 종합하면 국정원은 임씨의 자료 삭제를 방치했거나 조장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국정원이 임씨를 단순 기술자라고 소개한 이상 임씨의 단독 범행으로 보기는 쉽지 않고 상부의 지휘 체계에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언론 플레이의 논리적 모순도 드러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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