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는 평등하다. 면역력이 약한 노인들이 더 취약하긴 하지만 젊은 의사도 걸렸고, 7살 아이도 걸렸다. 부의 상징인 서울 강남도 예외가 아니었고, 조금은 더 안전할 것 같았던(?) 삼성서울병원이 확산의 주요 진원지가 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키워드가 ‘불안’으로 요약되는 순간부터 구성원들의 불만은 메르스보다 더 빠르게 확산됐다. 

국가 전체가 위기에 빠졌는데 국가는 빠졌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언론은 메르스 확산을 ‘개념 없는’ 시민들 탓으로 돌렸다. 메르스 감염 병원 방문 등의 사실을 숨기고 격리 통보를 어긴 채 돌아다닌 사람들을 정부가 모두 통제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불안에 떨던 국민들은 불만의 원인을 멀리 있는 정부에서 찾기보다는 내 곁에 ‘개념 없는’ 사람에서 찾았다.

역시 여자들이 문제였다. ‘김치녀’들이 격리를 거부하고 홍콩에서 도망 다녔다고 알려졌다. 인터넷 사이트 디씨 인사이드(디씨)는 자신의 증상을 얘기하며 메르스에 걸린 것인지 의심하는 글이 올라오더니 여성 혐오 게시판으로 변질됐다. 하지만 이곳은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와 같은 남초 사이트가 아니었다. 이곳은 메르스 갤러리다. 여성도 이용한다. 

여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일베에서 남성이 여성을 비하했던 방식을 그대로 원용해 성별만 바꿔 넣었다.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김치녀’대신 ‘김치남’을 사용했고, 여성의 가슴크기를 가지고 모욕을 주던 것 대신 남성의 성기크기를 가지고 비꼬는 식이다. 결혼할 남자는 동정이었다는 글도 올라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다.

   
 
 

통쾌하다는 여성의 의견이 나왔다. “김치놈 새끼들 멍청해서 이해를 못하는거냐? 여기 글 니들이 하던 짓이잖아”, “당하니까 부들부들하지?” 메르스 갤러리는 남녀의 전쟁터로 변질됐다. 혐오가 고통과 불안을 외면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점에서 메르스는 여성 혐오나 남성 혐오(또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과 연결됐다. 개연성 있는 우연이다.

혐오를 왜 혐오로 맞서느냐는 주장이 맞섰다. 남성 혐오와 여성 혐오의 맥락이 다르다. 같은 말이라도 강자의 표현은 폭력일 수 있지만 약자의 표현은 풍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단어는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라 약자에게 보장될 때 뜻이 통하는 말이다. 광주의 지역주의와 대구·경북의 지역주의가 같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혐오의 대상은 사실 실체가 없다. 일베는 그동안 온라인 속 이미지를 향해 분노를 뿜어냈다. 세상에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지갑 없이 데이트에 나가 메르스에 걸려 격리 조치를 무시하고 돌아다니는 여성을 본 사람은 없다. 그저 사회·경제적 억압, 일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현실에서의 폭력은 곧 불법이 되므로 인터넷 안에서 약자들(여성, 전라도사람)을 조롱해온 것이다.  

성별과 고향은 태어나는 순간 정해지는 성격의 것이다. 남자이기만 하고 전라도 사람이 아니기만 하면 여성과 전라도 사람을 욕할 권리(?)를 얻는다. 지배자들이 고대 로마시대부터 진리처럼 여기는 ‘분할 통치’ 전략은 이런 불변의 것을 근거로 이루어질 때 강력하다. 

   
▲ 메르스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일베는 무능한 정부를 비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박근혜 대통령보다 높게 평가했다. 혐오는 실체가 없는 대상을 향하고, 실체가 명확하다면 혐오의 대상으로 계속 남아있기 어렵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모두에게 불안이 닥쳤을 때 한국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드러난 것이다. 여성 혐오는 이제 지역주의 갈등을 뛰어넘었다. 

호남과 영남의 갈등은 세대가 바뀌면서 사라지는 분위기다. 지배자 입장에서 이제는 여성과 남성의 갈등이 효과적이다. 이번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전 사회적 공포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성별 갈등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확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호남과 영남의 지역주의를 같은 것으로 놓고 비난하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듯이 남성 혐오와 여성 혐오를 같은 것으로 놓고 비난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남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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