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데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덥지 않다”고 답했다.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겨울에 옷을 다 벗기고 손을 묶은 뒤 찬물을 뿌리는 물고문을 당한 뒤로는 추위에 예민해졌어요. 한여름에도 덥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한종선씨(40, 남)가 ‘내무부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등 피해사건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특별법)통과를 위해 지난 4월28일부터 국회 앞 노숙농성을 한지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 한낮에 30도가 넘는 때 이른 여름 날씨가 찾아왔다.

지난 2012년 5월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외치며 1인 시위를 했던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씨를 2015년 5월 국회 앞에서 만났다. 그는 종종 주저앉을 것 같이 절뚝거렸다. 허리도 다리도 성치 않았다. 그가 평생을 슬프게 살아왔고, 아프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그의 걸음걸이에서부터 느껴졌다. 

   
▲ 형제복지원 건물은 그곳에 갇힌 사람들이 맨손으로 지었다. 3차에 걸친 준공끝에 건물이 지어졌고, 박인근 원장의 사적인 시설을 짓는 곳에도 형제복지원에 끌려간 이들이 동원됐다. 사진=형제복지원사건진실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제공
 

1984년 9살의 나이였던 한씨는 12살이던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한씨는 형제복지원에서 나오던 1987년에는 누나와 아버지의 행방을 몰랐다. 일상이 된 성폭행과 구타로 누나는 형제복지원 안에서부터 정신질환을 앓게 됐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뒤늦게 끌려간 아버지 역시 정신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1987년 형제복지원에서 방출된 이후 한종선씨는 두 번의 교도소 생활과 방황, 건설 현장에서의 허리부상으로 인해 기초생활 수급자가 됐다. 그 과정에서 부산의 한 정신병원에 누나가, 울산의 한 정신병원에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세 가족이 정부로부터 받는 수급비는 약 98만원, 병원비를 제외하면 58만원, 방세, 휴대폰 요금 등을 내고 두 사람 간식을 사면 한씨 수중에 남는 돈은 월 20만원이 채 안 된다. 

“괜히 돈 벌다 기초수급자 탈락하면 두 사람 병원비를 대야 하는데, 그럼 월 500만원 이상 벌어야 해요. 돈 벌지 말라는 소리죠.” 어렸을 때 형제복지원에 갇혀있던 한씨가 지금은 기초수급제와 부양의무제에 갇혀있는 셈이다. 하루에 한 끼 먹는 날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아픈 곳을 치료하거나 약을 정기적으로 먹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씨는 형제복지원 정문에서 가로막혔던 그들의 복지를 찾고 싶은 다른 생존자들에게 희망이다. “누나와 아버지가 둘 다 (정신)병원에 있는데도 말짱하게 2012년에 혼자 국회 앞에 섰고, 지금도 딱딱한 바닥에서 혼자 자는 종선이를 보면…” 1983년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가 86년에 탈출한 박순이(45, 여)씨는 한종선씨 이야기가 나오자 금방 눈물이 고였다. 

피해자들은 일상생활이 불편할 만큼 예민해져있다. 박씨는 벽을 보고 잠들지 못한다. TV를 켜놓고 사람들이 오가는 문이 보이는 곳이라야 조금 잘 수 있다. 중학생인 두 딸은 엄마(박씨)가 불안해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시로 자신의 이동경로를 문자로 보고한다. “형제복지원 트라우마지. 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보내도 내가 다 데려다줘야 안심이 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형제복지원 편을 본 박씨는 “그 때 열쇠로 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며 “그런 사람(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은 당연히 죽었을 줄 알았다”고 당시의 심정을 회상했다.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잔다’는 속담은 틀렸다. 박 원장이 1000억대(추정)의 사회복지 재벌로 살 동안 박순이씨는 술을 먹어야 겨우 하루에 3시간 정도 잠들면서도 자신이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며 살아야했다. 

1977년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던 윤승식씨(당시 10세, 남)는 “쪽팔려서 (피해사실을) 숨기고 살았다”고 했다. 1985년에 탈출해 여기저기 일자리를 소개해달라고 했지만 ‘형제복지원 출신들 손버릇 안 좋다’는 낙인 때문에 윤씨는 쉽게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죽고 싶었지만 자살할 곳을 못 찾아서 죽지 못했다”는 윤씨는 형제복지원 감금 후유증으로 현재 지체 2급 장애인이다.   

   
▲ 돈 벌려고 쓴 책이 아니다. 돈 벌겠다는 사람들에 의해 망가졌던 과거가 있으니까. 책의 공저자가 되면서 생존피해자 한종선씨는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찾았다.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 전규찬, 박래군 지음/ 이리 펴냄.
 

한종선씨의 저서 <살아남은 아이>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렇다.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한씨는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교수와 박래군 인권활동가와 함께 이 책의 공저자가 됐다. “이 사회는 배우지 않은 사람들의 말은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씨는 2012년부터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시작으로 현재는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4월 한씨는 아쉽게도 5점이 부족해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지 못했다. 국회에서 노숙농성을 하면서 오는 8월에 있을 다음 검정고시를 준비 중이다. 5점. 신민당 보고서(87년 2월 발표)에 따르면 경찰이 부랑아를 잡아 구류조치하면 2~3점의 근무평점을 얻지만 형제복지원에 보내면 5점을 얻었다. 누군가의 5점을 위해 누군가는 죄 없는 죄인의 삶을 견뎌간다.

한씨는 꿈이 있다. 대학에 가서 법학을 공부해 인권유린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고, 심리학을 공부해서 자기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약자들을 공감하고 대변하는 활동가가 되고 싶다. 한예종에 입학해 예술로 자신의 삶을 조명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는 이미 꿈을 이뤘는지도 모른다. 시민들에게 특별법을 설명해주고, 생존 피해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틈틈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 

“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 군부독재의 사회정화사업이 삼청교육대만 있는 줄 아는데 형제복지원도 있었다. 잘못된 정책 하나가 얼마나 많은 인권유린을 가져오는지 모두가 알아야 한다. 도가니 사건이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선 안 된다.” 그는 오늘도 자신과 병원에 있는 두 가족과 인권유린을 당한 수많은 약자들을 위해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 옆 맨 바닥에 몸을 누인다.

   
▲ 4월 국회 마지막날인 지난 4월 28일,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6월 국회로 미뤄지던 날이다.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11명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머리를 밀었고, 그날부터 한달 넘게 한종선씨는 국회 앞에서 노숙농성 중이다. 사진=장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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