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해방 70년을 맞은 대한민국에 대해 19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해방이후 조국은 독립운동가들이 원하던 나라가 아니었다”며 “(일제에 협력한) 저들이 이끌어온 나라”라고 평가했다. 그는 그럼에도 역사가 잘못을 교정할 것이며 이런 시대에 야당 원내대표가 된 것이 자신에게 위기이자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야당 원내대표가 된 직후 눈 앞에 닥친 심각한 당내 갈등에 대해서도 이 원내대표는 “호남은 뿌리요, 친노는 줄기”라며 “불편해도 둘은 늘 같이 가야 하며, 병든 이파리가 생겼다면 이파리를 떼어내야지 뿌리와 줄기는 같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내대표로서 연대와 통합의 가치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할아버지의 동지들은 우리 가족에겐 불편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이날 새정치연합 원내대표실에서 가진 미디어오늘 지령 1000호 기념 인터뷰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자신이 살아온 ‘과거사’를 자세히 언급했다. 1932년 작고한 우당 이회영 선생이 그의 조부인데도, 그에 대한 기억은 자랑스러움 보다는 불편함이었다는 점이 요지였다. 안양에서 나고 자란 이 원내대표는 할머니(우당 선생의 부인 이은숙씨)가 할아버지의 항일운동에 대해 거의 얘기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안양에 살 때 할머니와 큰아버지, 고모도 계셨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본인의 자서전 ‘서간도 시종기’를 하루에 한두 페이지씩 쓰시면서 제게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 그 때도 할머니는 할아버지 동지들의 항일운동에 관해서는 거의 얘기하신 적이 없다. 그런 경력과 투쟁경험이 할머니를 지탱하게 하는데 아무 도움이 안된다고 여기셨다. 심지어 며느리인 우리 어머니께도 썩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닌었던 것 같다.”

그는 특히 자신이 ‘부위 할아버지’라 불렀던 우당 선생의 항일 동지이자 광복군 대장까지 지낸 이관직 선생과 독립운동가 출신이면서도 해방 후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우관 이정규 선생에 대해 당시 자신의 가족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털어놨다.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연합뉴스
 

이 원내대표는 “할아버지와 먼 처남 쯤 되는 ‘부위 할아버지’는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추후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분으로 프랑스 같은 곳에서는 전쟁영웅으로 불릴 만한 분이었으나 우리에겐 늘 꽤죄죄한 갓 쓴 노인으로 어머니에게조차 제대로 대우도 받지 못했다”며 “그 분이 오면 건넌방을 내 드려야 하니 가족이 방을 다 옮겨야 했다. 늘 불편해했고 가족에게도 자랑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이 원내대표는 “이에 반해 우당 선생의 제자이자 아나키스트 활동을 했던 우관 이정규 선생은 일본에서 경흥의숙을 다니다 해방후 성균관대 총장을 해 독립운동가 중 가장 출세한 사람이었다”며 “우관 선생은 우리가 살던 안양 시골마을에 세단을 타고 나타나 늘 쇠고기를 사들고 왔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대우가 달랐다”고 말했다. 우관 선생의 업적이 부위 할아버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는데도 자신의 삶에 있어 가치전도가 일어났던 것이라고 이 원내대표는 평가했다.

“해방된 조국은 내가 바라던 나라가 아니었다…역사는 반드시 교정될 것”

이 원내대표는 이런 세태가 온 나라에 만연된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자신은 중학교를 예원학교라는 예술학교에 들어갔다가 경기고에 입학했다. 서울에서 선발시험을 보는 유일한 중학교여서 예원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내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 그는 “예원학교에서도 잘사는 애들이 많았다”며 “내가 그들에 반항도 하고 악동 역할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뭔가 지배계급이나 부유한 계층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피아노치며 보내는 생활이 너무 한가하고 사치스럽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운동을 하게 됐다”고 떠올렸다. 자신의 막내 동생(이종현)과 고교 시절 많은 문제의식을 나누며 학생운동도 하게 됐고, 법률가가 되기로 했다고 기억했다. 

그런 문제의식을 하게 된 기저엔 자신의 할아버지 형제 자손, 동지 등 주변 사람들이 고단하고 비루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라 한다. 이 원내대표는 “항일의 역사가 다음 시대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며 “항일을 들춰내면 더 많은 피해를 보거나 평가받아선 안될 사람들이 나라의 주체가 돼 사회 주류적 분위기를 만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큰아버지와 고모부도 아나키스트로, 중국의 일본계 은행을 털다 감옥에 갔으며, 큰아버지는 감옥에서 13년6개월 만에 해방과 함께 출소했다”며 “해방이 됐는데도 그런 분들이 사회적으로 패퇴해가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해방된 이후 큰 아버지가 정릉에서 살았는데, 집앞을 지키고 있던 형사가 다름아닌 일본 고등계 형사였던 사람이었다”며 “경력 세탁을 통해 해방이후 설립된 경찰의 고위직이자 건국세력이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 큰 아버지의 고모부도 박물장사를 하다 실패했으며 큰 아버지 역시 결국 홧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전했다. 

이를 두고 이 원내대표는 “항일전사들이 개인적 활동을 할 수 없는 사회로 내몰렸다”며 “식민지 시절 조국을 찾겠다고 싸우다 나라 찾았다고 와봤더니 그들이 그리던 조국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수십년간 못잡았던 김구 선생을 해방된 나라에선 단 몇 년만에 죽여버린 조국이었다”며 “이곳엔 저들만의 세상이 있었으며, 저들의 세상이 이 땅을 이끌어온 것이 오늘의 역사가 아니겠느냐”고 개탄했다. 이 원내대표는 “그러나 도도한 역사는 진보할 것으로 믿으며 결국 교정될 것”이라며 “친일의 총아였던 독재를 무너뜨린 것처럼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고 역설했다.

“부친 박정희의 친일까지 박근혜에 문제삼고 싶지 않다”

이 원내대표는 그러나 현재의 대한민국 지도자에 대해서는 그들의 뿌리(친일)를 문제삼고 싶진 않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왔으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은 일제시절 경북도회 의원 및 전쟁동원 친일단체 ‘조선 임전보국단’ 간부를 맡았다는 기록(1941년 매일신보)이 있다. 

   
19일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미디어오늘에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야당원내지도자가 된 의미를 밝혔다. 사진=조현호 기자
 

이 원내대표는 “우리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항일의 뿌리를 가진 힘으로 (친일)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뒤 민주정부를 이룬 경험이 있다”며 “정리되지 못한 역사에 대한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개별 정치적 인물에 대해 친일의 가계를 갖고 있다는 ‘독소’를 문제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 스스로 이것을 부담으로 여기거나 왜곡된 사회의 질서 속에 쉽게 드러나면서 간접적으로 그런 평가를 받을 수는 있겠으나 그런 ‘독성’의 역사까지 연결해 문제삼고 싶지는 않다”고 털어놨다.

“호남은 민주당의 뿌리, 친노는 줄기…불편해도 다같이 가야”

이 같은 과거 이력은 정치인으로서, 특히 야당 지도자로서는 역대 단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특별한 정치적 자산이다. 이 원내대표는 과연 이런 선친의 후광을 등에 업고 때로는 정글같고, 때로는 비정한 현실정치를 돌파할 수 있느냐는 시험대에 올라 있다. 당장 눈앞에 닥친 당내의 심각한 갈등과 제1야당에 대한 민심이반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도 과제이다.

정청래-주승용 의원의 충돌로 빚어진 호남-친노간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묻자 이 원내대표는 의외로 간명하게 답했다.

그는 “여러 사안을 보는데 있어 가장 오류가 적은 방법은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라며 “역사적 맥락에서, 특히 민주당의 역사의 과정에서 호남은 민주당의 뿌리였다. 이후 그때 그때 일어난 줄기와 나무가 있다.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의 역사를 갖고 있는 민주당의 친노는 민주당에서 큰 줄기”라고 진단했다.

이 원내대표는 “호남과 친노는 뿌리와 줄기의 관계”라며 “뿌리가 많으면 줄기가 불편해지기도 하고, 줄기가 강하면 뿌리가 불편해질 수 있으나 서로 같이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계파의) 패권주의라는 일종의 독성이 있는 이파리가 생겨서 병에 걸렸다면, 이 이파리를 떼어야지 서로 없앨 수는 없다”며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야당 지도자 된 것, 위기이자 기회”

이 원내대표는 광주민주화운동 35주년에 대해 “광주항쟁은 친일정권의 후예라고 할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며 “광주는 항일 학생의거의 고향이기도 하다. 특히 친일에 연결된 독재정권에 더 맞서서 싸웠다는 역사적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역설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 야당 원내 사령탑이 된 것에 대해 이 원내대표는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70년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일본의 손아귀로부터, 그 유대를 가지려는 (세력의) 기운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면서도 “이런 상황을 헤쳐나가지 못하면 제게 위기가 올 것이요, 이를 잘 극복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면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려울 때마다 늘 할아버지(우당 이회영)를 떠올린다”며 “할아버지에 누가 되지 않는 정치생활 해야겠다는 생각을 마주치는 곳곳에서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누구] 민변간사 안양서 4선…정치적 기반 얕다는 평도

1957년 5월 22일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태어나 안양시 만안 지역에서 자란 이종걸 원내대표는 예원중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및 공법학과(편입)를 졸업한 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연수원을 마치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간사를 맡으며 인권변호사 활동을 했다. 이 시절에 신정훈 서울대 교수의 성희롱 사건(일명 우조교 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여성인권 문제를 공론화했다.

현재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를 지역구로 4선(16~19대 국회) 의원이 됐으며, 지난 7일 처음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의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이 원내대표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를 공개해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으로부터 손해배상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2013년 1월 법정에서 이 원내대표는 고소인인 방 사장을 법정에서 신문해야 한다며 출석을 촉구하는 등 조선일보 권력과 맞서기도 했다. 이후 조선일보가 장자연 사건으로 자신들이 제기했던 모든 소송을 취하하는 것으로 이 사건이 마무리됐다.

4선 의원임에도 이 원내대표는 그동안 당내 비주류로 분류되는 등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점 외에 당내 정치적 기반이 얕다는 평가도 받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