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침몰사건 이후 해군 장교들이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를 고소한지 19일로 만 5년이 흘렀다. 2010년 8월 27일 검찰의 공소장이 접수된 이후 천안함 재판은 공판준비기일만 1년이 걸렸고, 공판이 진행된지 4년이 됐다. 공판 횟수만 해도 36회를 채웠을 뿐 아니라 증인은 47명에 달하고, 남은 증인까지 포함하면 70여 명에 이를 전망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지난 5년 동안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결론을 낸 뒤 덮고자 하고 있으나 그동안 제기된 여러 의문이 사실로 밝혀져왔다. 지난 5년의 천안함 재판을 정리했다.

생존자들 증언 “아무 이상 없었다…쾅 다른 선박과 부딪힌 줄 알았다”

무엇보다 사고를 전후로 핵심 위치에 있던 생존자들은 사고순간까지 특별한 징후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으며, 사고 순간에도 무언가에 부딪힌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지난 2013년 12월 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 신상철 대표 공판에 출석한 김기택 전 천안함 음탐사(해군하사)는 자신의 직전 근무자로부터도 특이사항을 전달받은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고순간까지도 음탐상 이상을 감지한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상 신호가 있었으면 모니터와 스피커에 나타나, 이상상황이 있으면 보고하는데,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며 “(당시 감지된 소리는) 일반적으로 나오는 여러가지 소음과 노이즈”였다고 전했다.

특히 폭발위치에 가장 근접한 곳에서 휴식중이던 생존장병은 다른 선박과 부딪힌 줄 알았다고 전했다. 사고순간 천안함 흘수선 아래 침실(CPO-수면하 침실)에 누워있던 천안함 전탐장 김수길 상사는 지난해 10월 27일 공판에 나와 “당직시간인 그날 16~20시 근무후 교대한 뒤 취침하러 ‘CPO실(수면하침실)’로 내려와 21시20분쯤 스탠드를 켜고 눈감고 있을 때 ‘쿵’소리가 들렸다”며 “다른 선임하사가 근무하고 있는데 다른 함정하고 부딪혔나 하고 있었는데, 몇십초 만에 다시 쾅 하는 소리가 나면서 배가 넘어졌다. 뭐에 부딪히는 소리인 줄 알았다. (천안함보다) 큰 함정이거나 동급함정에 부딪힌 줄 알았다”고 전했다.

   
평택 해군 2함대 안보공원에 전시된 천안함. 사진=조현호 기자
 

그는 첫 번째 ‘쿵소리’ 이후에 들었던 ‘쾅’ 소리에 대해 “처음 ‘쿵’ 소리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두번째 쾅 할 때도) 물체(함정)와 배(천안함)가 부딪힌 것으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사고순간 41포 RS실에서 당직근무중이던 천안함 병기병 안재근씨 역시 지난해 12월 22일 공판에서 “‘쾅’ 하는 충돌음 소리 뒤엔 길게 찢겨지는 소리가 났다”며 “뭐가 와서 때리는 소리였다”고 진술했다.

“함장이 어뢰로 보고하라고 시켰다”

합조단 보고서에 따르면 사고 직후 모든 보고라인엔 천안함이 파공후 침수 또는 좌초된 것으로 전달됐으나 20여 분 뒤부터 보고내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어뢰피격으로 변경된 것이다. 천안함 포술장 김광보 대위가 당일 21시28분 “좌초다”라고 보고한지 20여 분 만인 21시51분 천안함 통신장 허순행 상사는 “본국 어뢰, 어뢰로 사료됨”이라고 백령도 레이더기지에 보고한 것으로 보고서엔 나온다. 

보고 내용이 바뀐 것과 관련, 허 상사는 최원일 천안함장의 지시에 의한 보고였다고 밝혔다. 그는 2012년 8월 27일 공판에 출석해 사고 직후 백령도 기지와 호출부호를 통해 침몰사유 통보 요구가 와 갑판에 나와있던 일부 장병들과 최 함장이 상의한 뒤 “어뢰피격으로 보고해”라는 지시를 받아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 판단 근거에 대해 “정확히 어떤 근거로 판단했는지는 모른다”고 답했다.

해경 부함장 “좌초 전문받아” 해작사 작전처장 “‘9시15분 좌초’로 합참에 보고”
백령도 초병 “중대상황실에서 9시31분, 좌초 전달받아”

천안함 재판 시작부터 증인들이 사고 초기 보고 상황은 좌초였다고 증언했다. 천안함 구조를 지휘한 유종철 해경501함 부함장(경위)은 2011년 8월 22일 첫 공판에 출석해 “구조하러 가는 중에 ‘좌초’라고 연락을 전문으로 받았다”고 증언했다. 심승섭 해군작전사령부 작전처장은 그해 9월 19일 공판에서 “해작사에서는 합참에 보고할 때 (최초상황이) 21시15분경으로 보고했다”고 밝혔다.

사고 직후 언론에도 ‘21시15분 좌초,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고 발표했던 해경의 이병일 전 경비과장은 2013년 12월 9일 공판에서 “(상부의) 지시사항에 의해서 발표했다”고 설명했다. 이 전 과장은 2010년 3월 28일 해경 보도자료에 ‘21시15분’으로 기재된 경위에 대해 “인천해양경찰서가 해군 쪽으로부터 사고 발생 이후 통보받은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백령도 해병대 247초소 위치에서 본 천안함 사고해역. 사진=조현호기자
 

또한 천안함 사건 직후의 유일한 목격자인 백령도 초병 2명은 사고가 좌초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김승창씨(당시 일병)는 지난 2012년 11월 26일 공판에서 “당시 PCC가 좌초됐다는 중대본부로부터 보고를 받았다”고 했으며, 함께 근무중이던 선임자 박일석씨(당시 상병)는 그해 12월 17일 공판에서 “그날 밤 9시23분에 ‘쿵’ 소리와 함께 퍼져보이는 불빛(섬광)을 보자마자 즉시 상황실로 보고한 뒤 9시31분에 ‘PCC가 좌초됐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 같은 증언은 지난 3월 출간된 이종헌 전 청와대 행정관이 쓴 <스모킹 건>에도 기록돼 있다.

CCTV 시간 하나도 안맞아, 생존자가 마지막 CCTV 사진에 등장

천안함의 폭발증거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선체 내부 CCTV 11개가 모두 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도 재판과정에서 확인됐다. 복원된 11개 CCTV 가운데 사고시각(21시21분57초)에 가까이 촬영된 영상의 시각이 21시17분03초인 이유에 대해 합조단의 사이버영상팀장(해군 헌병단 중령)은 2012년 9월 24일 공판에서 “카메라(에) 내장(된) 시계상의 오차 때문이라고 판단했다”며 “그 외의 이유는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 전 팀장은 “카메라마다 시계가 있고, 11개 영상이 저장되는 본체 컴퓨터(통제컴퓨터)에도 시계가 있다”며 “하지만 본체에 있는 시계는 복원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증언에 당시 형사36부 주심판사는 “폭발시각은 미리 정해져있는데, 합조단이 폭발시각에 (끼워)맞춘 것 아니냐”고 추궁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합조단 보고서의 자료사진에 함미 후타실에서 희생자들이 운동하던 모습이 담긴 것과 관련해 이 가운데 생존자인 김용현 병장이 포함됐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어뢰 수거 대평호 선장 “해군이 준 좌표대로 작업”

천안함 침몰이 북한 어뢰의 공격이라는 결정적 증거라는 이른바 ‘1번 어뢰’ 인양 과정의 의문도 재판과정에서 나왔다. 김남식 대평호 선장이 1번 어뢰를 수거한 것은 2010년 5월 15일 아침이었다. 그러나 그 전날까지 3차원 입체 촬영기기를 보유한 고성능 탐색함이 한달 넘게 그 인근을 샅샅이 훑었으나 찾지 못했다.

김남식 선장은 지난해 7월 21일 법정에 나와 “(해군이 준) 포인트(좌표)를 정해놓고 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윤종성 합조단 군측 조사단장은 지난달 2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합조단 폭발위험분과에 소속된 ADD(국방과학연구원) 연구원들이 어뢰 폭발시 어느정도 되면 어뢰추진체가 후방 30~40m 지점에 떨어질지 시뮬레이션한 결과 어느 정도 위치에 떨어질 것이라는 자료 등을 어선에 전부 보내줬다”고 증언했다.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18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5년을 이어온 천안함 재판은 국가가 스스로 국민을 대상으로 국가안위와 관련된 중대사항에 대해 속일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낸 사건”이라며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뛰어넘는 일로 반드시 진실이 가려져야 할 재판”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2013년 상영된 <천안함프로젝트>에 출연한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 사진=아우라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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