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술꾼인 아버지의 폭력 속에 있다가 부모를 잃고 고아로 살았지만 술·담배를 멀리한 채 그림 그리기에 빠졌던 한 사람이 있다. 약 5000만명의 희생자를 낳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 유태인 학살의 책임자인 아돌프 히틀러(1889~1945)다. 개인의 삶을 강조하는 것은 그에 대한 연민을 자아내는 동시에 역사적 검증의 칼날을 무디게 만든다. 

중앙일보는 지난 2일부터 김종필 전 총리 인터뷰 연재를 시작했다. 2일 첫 인터뷰 연재에 중앙일보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오른손이 불편해 왼손으로 커피 잔을 든 김 전 총리’의 사진을 사용했다. “그의 기억력은 녹슬지 않았다”는 사진설명은 인간적 연민과 경외심을 모두 자극한다. 지난해 10월부터 진행했다는 인터뷰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자신을 좌익세력과 선을 긋고, 성공한 쿠데타를 혁명으로 둔갑시키려는 김 전 총리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 2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
 

"쿠데타면 어떻고 혁명이면 어떠냐"

인터뷰에서 그는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김 전 총리는 “쿠데타면 어떻고 혁명이면 어떠냐”며 부패한 군의 개혁(정군)과 장면 총리가 이끄는 무능한 정부의 개혁을 위해 “혁명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지배계층과 사회구조가 바뀌어 과거와의 단절이 있어야 하고 민심을 담아야 혁명이다. 그런 측면에서 4·19도 미완의 혁명인데 어떻게 5·16이 혁명일 수 있느냐”며 “진짜 민심을 담은 혁명을 원했다면 4·19 때 조용히 지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정희의 쿠데타 시도는 1960년 5월 8일부터 세 번 있었다. 한국문명교류연구소 권기봉 연구원은 자신의 칼럼에서 “장면 내각이 들어선지 18일 밖에 되지 않았으니 무능한 정부 개혁이란 구호는 결국 (쿠데타)핑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박 실장은 “정군(整軍)운동은 군 비대화와 인사적체로 인한 젊은 군인들의 좋은 시도지만 정군을 빌미로 군 바깥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5·16 쿠데타 주도세력인 김종필 등 육사8기는 당시 인사 상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김 전 총리는 박정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박정희와 함께 남조선노동당(남로당) 활동을 했던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박정희와 친하지 않으며, 박상희의 딸과 결혼한 자신도 좌익과 선을 긋기 위해 박상희를 “민족주의자”라고만 규정한다. 김 전 총리는 “박정희는 발언이 과격해 공산주의자로 몰렸다”며 “6·25 때 북한군과도 맞선 박정희에 대한 좌익 혐의는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터뷰에선 미국에서 박 전 대통령과 김 전 총리의 뒷조사를 한다는 소식에 반공을 국시로 5·16공약을 만들고, 보도연맹원 등 좌익사상범을 희생양으로 삼은 데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 2일자 중앙일보 4, 5면 기사.
 

“나의 장인(박상희)에 대해 황태성 사건과 관련 있어 나중에 기술하겠다”고 밝힌 부분도 앞으로 연재에서 관심 있게 볼 내용이다. 황태성은 박정희가 남로당 입당 시 보증인이며 5·16 쿠데타 이후 북한에서 밀사로 한국에 내려온 인물이다. 중앙정보부가 미국에 반공을 입증하기 위해 황태성에게 간첩죄를 적용해 사형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러 자료를 통해 제기된 ‘황태성을 통해 공산주의의 당 조직 노하우가 공화당 창당과정에 전수되고, 북한에서 창당자금이 전달됐다는 의혹’도 김 전 총리가 해명해야 할 문제다.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

박한용 실장이 꼽는 김종필에 대한 평가의 핵심은 ‘한일회담과 공화당 창당 자금’이다. <독도밀약>을 쓴 노다니엘 박사에 따르면 한일회담은 1952년 시작돼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 체결까지 14년간 1500회 이상의 회담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유·무상의 해방 축하금 명목 총 6억 달러와 일본 전범기업들에게서 온 비자금을 받고 독도밀약 등을 내용으로 해 굴욕협정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마무리됐다. 

박한용 실장은 “‘신악(박정희 정권)이 구악(이승만 정권)을 뺨친다’는 얘기는 여기서 나온다“며 ”일본에서 들어온 매국 뇌물과 4대의혹 사건으로 만들어진 공화당 창당에 대해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4대의혹 사건이란 중앙정보부가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벌인 주가조작, 일본 승용차 불법 반입 등 4가지 사건이고, 독도밀약은 한일 양국이 독도를 미해결 상태로 유지하고 한국이 점거하되 경비를 늘리지 않는데 합의한 양국 간 밀약이다. 노다니엘 박사에 따르면 독도밀약을 주도한 인물은 김종필의 형 김종락이다. 결국 중앙일보의 인터뷰 연재에 대해 박한용 실장은 “독재 역사를 덮으려는 시도”라고 규정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조차 지난달 25일 조갑제닷컴에 올린 글에서 박정희의 1972년 유신선포에 대해 “헌정을 중단시키고 1인 장기집권체제를 구축한 사실상의 쿠데타”라며 “박 대통령은 그가 존경하던 나폴레옹처럼 두 번 쿠데타를 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김종필이 내놔야 할 답변

1979년 12·12 신군부쿠데타 직후 부정축재 혐의로 잡혀간 당시 김종필 의원의 몰수재산만 100억이 넘었다.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vs김영삼>에 따르면 그가 실소유주로 있는 일요신문에서 61억, 제주 감귤농장 28억원, 고향 서산땅 37억원, 현금과 예금 43억 등이 국가에 환수됐다. 부끄러운 과거 탓일까, 김종필은 이번 인터뷰에서 뿐 아니라 수차례 회고록을 남기지 않겠다고 밝혀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 직접 남긴 회고록이 없어 5·16 쿠데타와 군부정권에 대한 생생한 증언은 쉽게 찾기 어렵다. 

박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자 10·26 현장에 있던 유일한 생존자인 김계원 전 비서실장의 자서전 가 나왔을 때 주목을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5·16혁명공약’을 작성한 뒤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1997년 첫 정권교체의 ‘조력자’까지 겪은 김 전 총리를 “현대사 연출가”라고 평가한 증언록은 사실상 회고록의 성격을 띠고 있다. 중앙일보는 남은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가 그와 독재정권에게 던지는 상식적인 물음에 대해 답변을 내놔야 한다.

   
▲ 4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