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선개입 유죄 선고를 받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등의 수사과정에서 사이버 선거개입을 한 것으로 밝혀진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도 선거개입 지시를 받으면서 당혹스러웠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정치적 중립과 배치된다고 느끼고 당혹해하면서도 지시를 이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국정원 스스로 지난 2007년 작성한 보고서에서 “정보기관의 불법적인 선거개입은 정치적 독립성을 지켜야 할 정보기관이 스스로 존립 근거를 훼손하고 최고 주권자인 국민 위에 군림하는 행위”라고 비판해놓고도 5년만에 버젓이 선거개입 행위를 했을 뿐 아니라 들통이 나자 ‘불법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몰염치’한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이 나온다.

19일 서울고법 형사6부(재판장 김상환 부장판사)가 내놓은 판결문(지난 9일 판결)을 보면, 원 전 국정원장과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 지시에 심리전단 직원들조차 혼란을 겪었을 것이라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특히 원 전 원장과 민 전 단장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고 주문했다는 두 피고인의 주장에 대해 재판부는 “이런 발언은 정치관여나 선거개입을 하지 말라는 데 방점을 둔 것이라기보다 대선 정국에서 국정원 직원들의 활동이 외부에 드러나 문제 되는 일이 없도록 더욱 조심하라는 데 방점을 둔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며 “국정원법위반죄 및 공직선거법위반죄의 성립을 인정함에 있어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지난 9일 국정원 대선개입 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법정에 출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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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전 원장은 정치적 중립 같은 발언을 하면서도 동시에 직원들에게 기존의 활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강조하고, 선거 시기에도 종전과 같은 사이버 활동을 적극적으로 계속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의 발언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이 “우리 국정원은 금년에 잘 못 싸우면 국정원이 없어지는 거다”, “종북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 가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다시 정권을 잡으려고 한다”, “종북세력 척결과 국정성과 홍보가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연결되는 문제임을 명심해야 한다” 등의 표현을 사용해가며 국정원의 소관 업무 외에 국정 전반을 챙기고 홍보하도록 반복하여 지시했다고 지목했다. 또한 원 전 원장이 선거직전인 2012년 11월 23일에는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은 당당하게 하되, 사소한 일에서 물의야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에 만전을 기해주기 바람”이라고 지시하기도 한 점을 지적했다. 

민 전 단장 역시 직원들에게 “2012년도는 조직의 생사가 달려 있는 만큼 업무 추진에 만전을 기해주길 바란다”, “현안홍보뿐만 아니라 대통령 직속기관답게 VIP 폄훼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 “종북좌파들의 진보정권 세우려는 시도를 저지해야 한다”, “쫄지 말고 당당하게 일해야 한다” 등의 표현을 쓰며 국정성과를 폄훼하는 종북좌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현안 홍보 등에 진력하도록 주문한 점이 지적됐다.

이 때문에 국정원 심리전단 요원들도 혼란스러워하는 진술을 했다고 재판부는 전했다. 재판부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심리전단 직원들은 위와 같은 원세훈과 민병주의 원론적 당부와 구체적인 업무지시(국정운영지원을 위한 국정성과 홍보, 종북척결을 위한 정부비판 세력에 대한 공박 활동) 사이의 괴리로 인해서 사이버 활동을 전개함에 있어 다소간에 혼란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7월 국정원 댓글 국정조사 때 출두했던 국정원 심리전단 요원 김하영씨.
@연합뉴스
 

실제로 재판부가 예로 든 심리전단 요원들의 진술을 들여다보면, 정치적 중립과 배치되는 지시에 당혹스러워 하거나 종북세력의 개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등의 심정이 드러난다.

“원론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큰 틀에서의 원칙적 지시였고 실제로 업무의 직접적인 지시가 되는 이슈 및 논지가 매일매일 하달되는데 그 내용이 정치적 중립과 배치되는 성격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일선에서 활동해야 하는 저 같은 파트원들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때가 많이 있었다.”(김아무개-검찰진술)

“사실 저희 팀원들도 트위터 활동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런 말들이 많았다. 서로에 대해 너무 세게 하는 것 아니냐, 신중한 자세로 자제해야 한다, 그런 의견 제안들이 있었다.”(이아무개-검찰진술). (이씨는 원심 법정에서도 ‘트위터 활동 당시 선거 개입 등 오해의 우려나 위험성을 인식한 것은 사실인가’라는 신문에 “맞습니다”라고 답변했다고 재판부는 전했다.)

“어떤 소재에 대해 어떻게 글을 쓰라고 지시가 내려오고 이에 입각하여 글을 쓰게 되는데, 솔직히 그 지시를 보면서 어떤 부분은 대통령이나 국정홍보의 측면이 더 강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상부에서 여러 사항을 고려하여 그런 지시를 내렸을 것으로 생각하고, 지시가 내려온 이상 그 지시에 따라 저희들은 글 게시 등 활동을 했다.”(윤아무개-검찰진술)

“업무 지시를 받는 과정에서 전달받은 종북세력의 개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추상적으로 정치중립을 지켜야한다는 지시말씀이 있기는 했지만, 선거와 관련하여 글을 올리면 안 된다는 취지의 지시를 받은 적은 없다.”(황아무개-검찰진술)

또한 국정원 심리전단 요원 신아무개씨는 항소심 법정에 출석해 “원 전 원장이 2012년 1월 27일 전 부서장회의에서 ‘어쨌든 제대로 된 사람들이 하면은 야당이든 여당이든 인천도 지난번에 송영길이도 그렇게 저쪽에 충남에 안희정이 그렇게 그거 한미 FTA 찬성 그랬잖아, 그러면 저거는 그런 사람은 일하는 거야, 야당이니까 밀어버리고 이럴 필요 없어요’라고 발언한 것을 보면 원장님도 국정원 직원들이 정치적 활동을 하고 있다는 편견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라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고 재판부는 전했다.

재판부는 이 같은 국정원 직원들의 진술을 들어 “직원들로서는 피고인들의 애매한 정치적 중립지시를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없었고, 실제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며 “심리전단 직원들은 피고인들의 원론적 당부를 정치적 중립의무 준수, 선거 불개입 지시로 받아들이지 않고 선거가 임박할 때까지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세력의 주장에 대해 공박하고, 여당 후보자를 지지, 옹호하고 야당 후보자를 반대, 비방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 등이 정치적 중립의무 준수, 선거 불개입을 지시했다고는 하지만, 실제 직원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라며 “숨소리도 지시로 받아들인다거나 상명하복이 생명이라는 국정원의 조직 특성상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국정원 안보전시관. 사진=국정원 홈페이지
 

특히 재판부는 국정원이 2007년 작성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시해 현재 국정원이 얼마나 모순된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지를 지적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국정원이 국민에게 솔직하게 내놓은 진지한 성출 가운데 원용할 수 있는 부분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정치영역에 대한 국가정보기관의 개입은 국가권력과 정책에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는 과정을 왜곡함으로써 민주주의 근본을 무력화하는 것이고, 국가정보기관의 권한 남용과 오용을 넘어서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위협이라고 할 것이다.”
“국가정보기관은 국가, 헌법, 체제를 내.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무엇이 ‘국가안보의 위해요소 또는 국가의 적’인가에 대한 문제는 정보기관의 자의적 판단에 맡겨진다. 그리고 ‘국가안보의 위해요소 또는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대상 또는 잠재적 대상에게는 사찰.감시.통제가 따른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언제든 권력집단에 의해 왜곡되고 무력화될 수 있는 것이다.”
“선거운동 기간 이전과 중간에 중립을 지켜야 할 정보기관의 불법적인 선거개입은 정치적 독립성을 지켜야 할 정보기관이 자신의 존립 근거를 스스로 훼손하고 민주주의 사회의 최고 주권자인 국민 위에 군림하는 행위이다.”
“정보기관의 정치개입 중에서도 ‘선거개입’은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되거나 합리화될 수 없는 문제다. 또한 그동안 정보기관 관련법 어디에도 선거에 개입할 권한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선거에 영향을 주거나 처음부터 특정 정치세력에 유리한 선거결과를 유도하고자 기획하고 이를 실행하는 행위는 어떠한 측면에서도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국가정보기관이 선거과정과 무관하면 무관할수록 오히려 선거를 통해 집약된 국민의 민주적 의지는 정보기관에 대한 신뢰로도 모아질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정보기관이 자신의 우수한 역량을 부당하고 불법적인 선거개입 등에 사용함으로써 본연의 업무역량을 스스로 약화시키고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면 앞으로는 국가, 헌법, 체제수호라는 국가정보기관의 본래 목적에 역량을 집중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정보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2007년 국정원 작성 보고서)

이를 두고 재판부는 “국정원이 솔직한 반성과 깊은 성찰의 결과로 스스로 만든 이러한 거울 앞에 서서, 원 전 원장 등 피고인들이 과연 이런 사이버 활동의 적법성과 함께 국민이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진지하게 따져보았는지 극히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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