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은 ‘어떤 시대를 쓰는지’ 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중요하다.” 

<추노>의 작가 천성일의 말이다. 사극이 옛 이야기 전달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반추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평론가 허지웅은 천성일의 말을 대중의 ‘욕망’과 연결지었다. “다수가 암묵적으로 욕망하고 있는 어떤 ‘결핍된’ 가치를 복원해내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방영된 KBS <정도전>은 천성일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정도전>은 기획단계서부터 현실정치를 염두에 뒀다. 극심한 양극화와 민생정치가 실종된 고려 말의 시대상을 통해 현실을 곱씹게 만들었다. 동시에 ‘개혁정치’라는 대중이 욕망하는 결핍된 가치를 복원하기도 했다. 뛰어난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에 앞서 이 같은 각본의 특성이 시청자의 ‘니즈’를 충족한 것이다. 

   
▲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의 포스터.
 

KBS 새 대하드라마 <징비록>이 지난주부터 방영을 시작했다. <징비록> 역시 현실에 시사하는 바를 강조하고 있다. 제작진은 “역사는 과거의 정치이고 정치는 현재의 역사”라며 “징비록은 500년 전 조선을 배경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고민과 이슈를 환기시킬 것”이라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지난주 방영분에서는 첨예하게 대립했던 동인과 서인의 붕당정치, 정통성 없는 군주의 콤플렉스, 실리와 명분 사이에 선 조선의 외교정책 등이 그려졌다. 

<정도전>이 ‘개혁정치’ 사극이라면 <징비록>은 ‘외교’에 중점을 두는 모양새다. <징비록> 포스터를 보면 일본과 명나라의 등장인물들이 비중있게 나온다. 불과 2회분을 방영 했지만 조선, 일본, 명나라의 역학관계가 극의 주된 소재이기도 했다.  

서인세력은 명나라를 받들고 일본을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 않는다. ‘종계변무’라는 외교적 문제가 해결되자 명나라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대규모 사신단을 보내자고 주장할 정도다.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걸핏하면 도발을 일삼는 ‘금수’의 나라로 여겨 통신사 파견조차 반대한다. 이 같은 시각은 서인의 좌장격인 윤두수(임동진 분)의 대사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가 왜와 국교를 맺는다면 명나라에서 우리를 어찌 보겠습니까. 역시나 근본이 같은 나라라 여기고 우리를 왜와 같이 대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명이 우리와 국교를 끊는다면 왜가 그것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말이오.”

주인공인 류성룡을 비롯한 동인은 유화적인 입장을 갖고 일본과 소통하려 한다. 류성룡(김상중 분)의 대사다. 

“긴 세월동안 우리가 저들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이젠 알아볼 때도 됐습니다. 국교를 맺든 안 맺든 그들의 사정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징비록> 속 3국의 관계는 오늘날 남과 북, 미국이 얽힌 동북아 외교상황과 맞닿아 있다.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문제는 5.24조치를 둘러싼 갈등상황을 연상시킨다. 나아가 선조시기 붕당정치의 한 축이었던 서인, 그리고 서인의 외교정책을 지지하는 선조를 통해 한국의 보수정치세력을 떠올리게 만든다.

극의 소재이자 드라마와 동명이기도 한 책 ‘징비록’은 일종의 반성문이다. 임진왜란을 막지 못한 이유, 전쟁을 조기에 끝내지 못한 원인 등을 분석해 담았다. 드라마 <징비록>의 궁극적인 메시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외교 단절이 결과적으로 전쟁을 예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능동적인 외교를 하지 못한 결과, 타국에 외교 주도권을 뺏긴 점 역시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시청자의 호응도 좋은 편이다. <징비록>의 첫 주 시청률은 닐슨코리아 조사 결과 1회 10.5%, 2회 9.5%를 기록했다. <징비록>의 시나리오는 뛰어난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과 결합해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징비록>이 <정도전>처럼 흥행을 넘어 하나의 현상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우리 정치를 향한 대중의 욕망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정도전>의 흥행이 개혁정치의 욕구가 투영된 결과라는 분석이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징비록>이 흥행한다면 자주적이지 않으며, 경직된 우리 외교정책 기조의 변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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