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이 애국심을 강조하며 언급했던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이 받던 월급은 54달러였다. 이 돈은 현재 환율로 계산하면 6만원쯤 된다. 6만원은 베트남 참전이후 파독 광부로 독일에 다녀온 장갑수(70)씨와 파독 간호사 출신 이연순(63)씨 부부가 한국 정부로부터 매달 받는 지원금이기도 하다.

장씨 부부의 삶은 영화 <국제시장>의 모습과 닮았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애국자이자 가장으로서 어려운 삶을 꾸리고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씨 부부에게 한국 정부는 ‘야속한 당신’과 같은 존재다. 영화에서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는 여동생 시집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베트남전에 참가했다.

반면 장씨가 수송병으로 입대해 이등병이었던 1965년, 장씨에게 베트남전은 힘든 한국의 군대생활을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였다. 각종 군 물품의 수송을 담당하던 장씨는 정기적으로 물품을 빼돌려 팔아 선임들에게 돈을 상납해야했다. 문제가 점점 커지자 장씨는 한반도에도 들리기 시작한 이국땅의 포성에 귀를 기울였다. 장씨는 같은해 11월, 육군 맹호부대 1만4000여명과 함께 이름조차 낯선 베트남으로 도망치듯 떠났다.

당시 실업률은 30%에 달했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난 이들도 많았다. 영화 <국제시장>을 본 장씨는 “영화에서 덕수는 전쟁 당시 미군들의 수송을 담당하던 한진그룹 직원을 표현한 것 같다”며 “베트남 참전인들 중에서도 제대 후 한진에 취업해 수송을 담당하며 돈을 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장씨는 “그들은 군인들과 함께 움직여 위험수당을 군인들과 똑같이 받기 때문에 수입이 괜찮았다”고 덧붙였다.

   
▲ 1965년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장갑수씨(오른쪽). 당시 21세. (사진 = 장갑수씨 제공)
 

군생활을 마치고 장씨는 평화시장에서 옷을 받아 길거리에서 팔거나, 인천에서 각종 생필품 밀수를 해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단속을 피하며 장사를 하느라 지친 장씨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파독 광부 모집에 지원했다. 영화에서 덕수는 남동생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파독 광부로 떠났다.

하지만 어렵던 시절, 그것도 광산 경험이 풍부하거나 소위 빽이 없으면 독일에 가기 힘들었다. 결국 장씨는 지인 소개로 당시 전북소속 한 국회의원의 도움을 얻어 1974년 5월 24일,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Land Nordrhein-Westfalen)에 있는 캄프린트포르트(Kamp-Lintfort)로 향했다. 영화에 등장한 뒤스부르크(Duisburg)와 같은 주에 있는 도시다.

영화에서 덕수는 가스누출 사고로 탄광이 무너져 깔리지만 극적으로 살아났다. 장씨는 “탄광 내에서만 알만한 작은 사고는 좀 있지만 저렇게 큰 사고는 잘 일어나지 않는 편”이라고 말했다. 장씨는 “70년대였지만 독일에서는 노동자들의 정신 건강에도 많이 신경을 썼고, 탄광에서 석탄을 잘못 실어서 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탄광레일만 관리하는 직원을 따로 둘 정도로 조심했다”고 말했다.

공기가 희박한 지하 1600m까지 내려가 40도가 넘는 온도 속에서 목숨 걸고 청춘을 검게 물들인지 3년째인 1977년 6월, 장씨는 파독간호사로 일하던 이연순씨를 만나 세달 뒤 결혼하고 두 아들인 필립장(Philippe Chang)씨와 알렉산더장(Alexander Chang)씨를 1978년과 1980년에 얻는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덕수도 파독 간호사 영자(김윤진 분)를 만나 결혼을 했다.

졸업 후 바로 서독 파견…“간호사가 시체 닦았다는 건 영화에서 처음봐”

이연순씨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장씨와 같은 주에 있는 에센(Essen)의 가톨릭 수녀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가 1971년 10월이었다. 전남 고흥출신인 이씨는 “학교 졸업하고 시골에서 돈 벌 곳이 없었다”며 “돈 벌 수 있다고 해서 서독에 가겠다”고 했다. 이씨는 영화에 나온 파독 간호사들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화에서 파독 간호사들은 차가운 시체를 눈물로 닦고 있었다.

이씨는 “여자 간호사들이 시체를 닦았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며 “여러 병원에서 근무해봤지만 독일에서 시체를 다루는 일은 모두 독일 남자 간호사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영화가 실제 광산 지역인 뒤스부르크에서 촬영해 현실감이 있는 면도 있지만 광산 폭발 장면이나 간호사들 고생하는 모습은 좀 과장돼있다”며 “독일은 한국 간호사와 달리 가족 면회가 제한적이고 간병인이 없어 간호사들이 그런 역할까지 다 하느라 업무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부부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장씨는 광산 일을 마치고 포도가 열릴 때는 포도농장에 가서 와인 생산을 돕는 일을 하거나 화원에서 꽃 키우는 일을 도왔다. 이씨는 휴일에 다른 병원에 가 세금 신고를 하지 않는 대신 저임금으로 추가 노동을 해 돈을 벌었다.

이씨는 “우리뿐 아니라 대다수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휴일 없이 번 돈을 한국에 송금하면, 한국에서는 외국에서 돈을 쉽게 버는 줄 알고 탕진한 경우가 많았다”며 “주변 사람들도, 국가도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만할 뿐 실제로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없다”고 말했다. 장씨도 “정치인들은 정기적으로 우리를 찾아 얼굴만 비친다”며 “지금도 영화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 같은데 그런 모습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40여년을 독일에서 이방인으로 살다 정년퇴임한 이후 부부는 노후를 어디서 보낼지 고민이 많았다. 부부는 80년대 번 돈은 가족들이 다 날리고, 90년대 번 돈은 서울의 한 상가에 투자했다가 회사가 부도나서 날린 뒤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부부는 결국 한국 땅에서 말년을 보내기로 했다. 장씨는 “돈을 다 날리고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겠다며 떠나, 퇴직 이후 살 곳을 알아보기 위해 물가가 싼 터키를 비롯해 날씨 좋은 이태리나 스페인도 알아봤지만 결국 가족이 있고 내가 살았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더라”고 말했다.

장씨는 고국에 돌아와 살기 위해 독일 영주권을 포기하고 정년퇴직 후 귀화를 준비했다. 장씨는 독일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던 병원 기록, 고혈압 등 그동안 고된 생활로 망가진 몸을 한국 정부에 입증해야 했다. 베트남 참전후유증을 입증해야 국가유공자로 지정되거나 참전 지원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유공자가 되기 위해 모든 건 혼자해야 했다. 독일 의료기록을 번역해 줄 사람을 찾아 공증을 받거나, 한국에 있는 독일대사관 잘못으로 서류를 분실해 시간을 날리는 동안 보훈처나 관련 기관에서 준 도움은 없었다. 2년여의 기다림 끝에 2011년 4월, 장씨는 병원 수술기록을 인정받아 국가유공자로 지정돼 매달 6만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현재 장씨의 생활비는 한국 정부 지원금, 독일에서 오는 연금과 미국에서 오는 참전 군인 지원금 등이다.

파독간호사, 연금문제 등 현실적인 이유로 귀화 못해

장씨가 광주광역시에 집을 얻어 자리를 잡자 부인 이씨도 귀국을 준비했다. 남편 장씨와 달리 이씨는 귀화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한국인으로 귀화하면 국가유공자 가족이 될 수 있지만 독일에서 나오는 연금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지난해 1월 말, 이씨는 심장수술을 받았다. 이씨는 “잠을 못자면서 일하느라 숨이 차거나 몸이 아픈 줄 알았는데 수술하고 몸이 괜찮아지고 나니 젊었을 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며 “남편이 한국에 있으니 빨리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한국에서는 심장수술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독일에서 수술(무상의료)을 받고 회복한 뒤 한국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이씨는 독일인이다. 지난해 7월, 이씨는 한국인으로 귀화는 하지 않은 채 독일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영화 <국제시장> 속 ‘애국자’는 정부 혜택이 없어 독일인으로 남았다. 한국인이 되면 독일에서 받는 연금이 30%정도 줄어들고 정부의 혜택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영화에서 주인공인 덕수(황정민 분)가 지난 삶을 회상하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라는 대사에 공감했다고 한다. 이씨는 “누굴 위해서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먹고 사느라 몸이 아파도 병가 한번 안냈다”며 “자식을 위해 살았다고 위로하고 있지만 독일에 있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고 말했다.

부부는 독일에서 이방인으로 40여년을 살다 고국에 왔지만 여기서도 이방인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장씨는 한국의 갑을관계, 치열한 경쟁과 억압적인 분위기 등 사회의 단면을 보고 한국에 많은 실망을 했다고 털어놨다. 장씨는 “지금 우리사회를 보면, 40여 년 전 파독 당시 각자 월급을 외국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국가에 대해 고마워해야 할 분위기”라고 말했다.

부부의 꿈은 소박하다. 현재 인천 남동구에 보훈 병원을 짓고 있는데 그 근처로 이사 가는 것이다. 이씨는 “늙으면 병원 가까운 게 최고”라며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으니 남편이랑 편안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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