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술자리, 술잔이 두어 순배 오갔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앞에 앉아있던 한 여성이 세월호를 꺼냈다. “단식을 할 땐 너무 안타까웠는데 유민아빠가 책을 냈더라고요. 이제는 (그 사람 진심을) 잘 모르겠어.” 그동안 세월호란 단어에 적잖게 울먹였던 그였기에 흠칫 놀랐다. ‘책장사’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 오해였다.

   
▲ 세월호 침몰사고로 희생된 고(故)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 ⓒ이치열 기자
 

이보다 몇 주 앞서 ‘유민아빠’ 김영오씨를 사석에서 만났다. 조촐한 저녁을 함께 했다. 그는 고민을 털어 놓았다. 넉넉잖은 생활로 인해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지-물론,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과 병행하겠다는 것-에 대해 숙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각종 라디오‧방송 인터뷰 출연료도 고사하는 사람이야. 그 돈으로 안전사회를 위한 공정보도를 해달라고 말하면서 거절했어.” 웃으며 농을 하다가도 ‘안전’, ‘세월호’, ‘공정언론’, ‘진상규명’, ‘특별법’ 얘기가 나오면 한없이 뻣뻣해지는 사람. 내가 본 유민아빠다.

<못난 아빠>. 2014년 한국 사회를 좌절과 절망에 빠뜨린, 썩을 대로 썩은 정부의 무능과 죽음까지 상품화하는 언론의 민낯을 샅샅이 드러낸, 세월호 침몰사고 한가운데 서있던 영오씨의 책이다. 그에게 물었다. 책은 왜 냈느냐고. “세월호 특별법을 오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진실을 알려야지…. 또 오해를 풀고 싶었어.”

그는 46일 동안 단식을 했다. 그 여파로 현재까지 음식물 소화가 쉽지 않다. 목숨을 건 투쟁은 오로지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서였다. 정부가 이들 요구에 제대로 귀를 기울였다면, 영오씨가 이토록 외로운 싸움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처절한 싸움은 한국 사회 밑바닥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 김영오씨 신간「못난 아빠」, 부엔리브로.
 

“경찰은 유가족을 생떼나 쓰는 무리로 보는 듯합니다. 정부가 그렇게 보는지도 모르죠. 생때같은 자식들을 어처구니없게 잃은 부모들을 그렇게 보다니요.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국회 농성만으로 부족하다, 목숨 걸고 단식이라도 하자는 결의가 이어졌던 겁니다.”(「못난 아빠」, 부엔리브로, P.40)

목숨까지 걸었건만 세월호 특별법에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빠져 있다. 유가족 요구에 정치권은 ‘야합’으로 응수했다. 여당은 물론이거니와 야당마저도 유가족을 외면했다. 시간이 흐르자 영오씨를 비롯한 유가족에게 야유와 비난이 쏟아졌다. 반인권단체들은 연대 단식을 하는 이들 앞에서 ‘폭식투쟁’이라는 해괴망측한 작태를 보였고, 소위 ‘공영방송’ 간부들은 서슴없이 유가족을 폄훼했다.

정치권 일부 여당 의원들은 ‘색깔론’으로 세월호 국면에서 사회를 분열시켰고, 극우 방송들은 맞장구치며 낄낄댔다. 이 나라 대통령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영화평론가 허지웅의 말을 빌리면, 박근혜 정부는 “멀쩡한 사람도 순백의 피해자가 아니면 인간말종으로 물고 늘어지는 전략”(한겨레 25일자 인터뷰)으로 정권 위기를 순간 모면코자 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 버젓이 일어난 까닭이다. 

   
▲ 김영오씨가 지난 15일 최일배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투쟁위원장(왼쪽)이 입원한 서울시 동대문구 서울시동부병원을 연대 방문했다. 지난 29일 10년간 복직 투쟁을 이어온 코오롱 해고노동자들은 농성을 정리했다. 코오롱은 노사문화발전을 위한 기금을 제3의 기관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사진가 박준수
 

세월호 침몰사고는 ‘선언’이었다. 광장에 모인 이들이 사회 구조의 변화를 기대했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 사건은 한 사회 명운이 사그라졌다는 사실만 선언적으로 ‘확인’해줬을 뿐이다. 그런데도 영오씨는 ‘희망’을 발견한다. 사람에게서.

“세상엔 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 여럿이 함께, 연대하면서 싸워야 비로소 힘이 되고, 압박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월호의 진상이 완전히 규명될 때까지 연대하는 한 사람으로서 싸우고 살아갈 겁니다. 밥벌이도 하면서 제 앞가림부터 해야 하지만, 미루지는 않을 겁니다.”(「못난 아빠」, 부엔리브로, P.216)

그가 ‘복직’을 위해 단식투쟁을 하거나 굴뚝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유는 누군가의 힘이 되기 위해서다. 그동안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과 사랑으로 깨달은 것은 결국 ‘함께 살자’는 연대 정신이었다. 인간사회를 ‘탈주’하려는 야만의 국가 권력을 직시하고도 “세상엔 선한 사람, 선한 의지가 더 많았다”는 영오씨. 그의 맑은 말에 스러져 가는 희망의 끈을 다시 부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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